책이름 :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지은이 : 조은
펴낸곳 : 민음사
책장에 수백 권의 시집이 쌓였지만 시인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시집․산문집 한 권 없었다. 리얼리즘 사진가 故 최민식 선생과 함께 작업한 포토에세이집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샘터, 2004)의 짧은 글이 시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일곱 군데의 《군립도서관》과 《작은도서관》에서 시인을 검색했다. 옹색하게 《작은도서관》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따뜻한 흙』, 단 한 권이 있었다.
작은도서관은 건물 이전으로 6개월째 휴관이었다. 시인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의 조급함은 《작은도서관》의 재개관을 기다릴 수 없었다. 시인은 1988년 계간 『세계의문학』에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를 통해 등단했다. 시인은 첫 시집 표제를 등단작으로 하고 싶었으나, 출판사 편집장의 강력한 권유로 『사랑의 위력으로』 했다. ‘민음의 시’ 시리즈는 2007년 절판된 시집 26권을 재출간했다. 내가 잡은 시집은 2007년 개정판으로 표제는 시인의 뜻이 반영되었다.
시집은 3부에 나뉘어, 63편이 실렸다. 해설은 시인 故 오규원의 「물과 벼랑」으로 “그의 시 쓰기는 전원적 지향의 정신이 자기회복 또는 자기수정을 위한 운동이다.”(105쪽)라고 했다. 1부에 연작시 「전원일기田園日期」 4편이 실렸다. 「전원일기田園日期 2」의 첫 2행은,
연일 폭락하는 값에 판매를 위탁한 과일이 실려 나가고
아버지가 뿌리는 밥상이 마당에서 우주처럼 돌았다
시인의 고향은 안동이다. 밭과 과수원이 있는 농촌이 시인의 전원이었다. 나에게 시인이 읊은 전원은 전두환 정권의 농산물폭락, 소값 파동으로 인한 농촌․농업․농민의 몰락으로 읽혔다. 80년대 안동의 과일은 사과였다. 마지막은 「유토피아처럼」(76쪽)의 전문이다.
유토피아처럼 과일 가게는 철거반에 헐리고 / 새로 지은 상가의 층계는 말쑥하다 / 아파트로 들어가는 차량들과 삶이 / 즐거운 부인들이 구경하는 데서 냄비와 물통과 문짝과 / 딸아이의 속옷까지 / 맥없이 끌려 나와 널브러지는데 / 대단하다 정말 수차례 당해 본 사람처럼 // 담담하게 / 두 딸과 남편의 도시락을 오늘 아침에도 / 꾸려 주는 저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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