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지은이 : 허연
펴낸곳 : 민음사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 시 앞에 섰다.
「휴면기」(74쪽)의 1․4연이다. 시인 허연(許然, 1966년 - )은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를 내고, 詩를 접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2008)는 13년 만에 출간한 두 번째 시집이었다. 아마! 밥벌이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 시절 시인은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였다.
시집은 부 구분 없이 63편이 실렸고, 해설은 차창룡(시인․문학평론가)의 「시인, 반항, 직관, 푸른색」이었다. 해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인이란 일찍이 허무를 알아 버린 자들이고, 허무를 알았음에도 대책 없는 자들이고, 또 스스로 대책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들”(93쪽)이라고. 다섯 편의 연작시 「슬픈 빙하시대」는 천민자본주의적 속물성을 드러냈다. 1은 사랑도 할 수 없는 시대, 2는 세상은 온갖 때가 묻은 시대, 3은 역사를 망각한 시대, 4는 돈 앞에 진실하지 못한 시대, 5는 비루한 생에 집착하는 시대.
시인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접한 시집은 재간행본 『불온한 검은 피』(민음사, 2014), 시선집 『천국은 있다』(아침달, 2021) 뿐이다. 군립도서관을 검색했다. 내가 잡지 못한 두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산문집이 떠올랐다. 대여 도서목록에 올렸다. 마지막은 표제시 「나쁜 소년이 서 있다」(17쪽)의 전문이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했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