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百백의 그림자

대빈창 2024. 1. 22. 07:30

 

책이름 : 百백의 그림자

지은이 : 황정은

펴낸곳 : 민음사

 

“고맙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174쪽)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해설 「『百의 그림자』에 부치는 다섯 개의 주석」에서 말했다. 지난 두 달간 문학평론가의 책 다섯 권을 몰아서 읽었다. 두 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한겨레출판, 2018)의 부록에 실린, 추천사 자선 베스트 10에 꼽힌 책이었다. 다행히 군립도서관에 초판본이 비치되었다.

『百백의 그림자』는 2022년 출판사 《창비》에서 문장을 정제하고 새로운 장정으로 재출간되었다. 소설가 황정은(黃貞殷, 1976- )은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더」로 등단했다. 그 시절 나는 새해벽두 일간지의 신춘문예당선작들을 찾아 읽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신예작가는 나의 독서성향과 거리가 멀었다. 소설은 작가가 등단한 지 5년 만에 펴낸 첫 장편소설이었다. 출간 직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고, 2022년 KBS와 한국문학평론가 협회가 선정한 ‘우리 시대의 소설’ 리스트에 올랐다. 200자 원고지 400매 분량의 경장편 소설은 2000년대 한국 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도심의 40년 된 전자상가가 소설의 배경이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상가가 터전인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둘 소개된다. 문학평론가가 밝혔듯이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살만한 곳’(174쪽)인지를 물었다.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9쪽) 첫 문장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그림자 분리현상은 ‘사회적 약자들이 현실의 폭력 앞에서 주체가 어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할 때 발생하는 일’이다. 백百의 그림자는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겪는 공포․분노였다. 그림자가 일어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곧 폭력과 아픔을 겪거나 겪어본 사람들이다.

작가는 신자유주의체제에서 실존적 위기에 신음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자기 그림자가 일어서는 존재들로 환상성을 더해 표현했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다급한 의무감을 가졌다.’ 문학평론가 해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책이 재출간되고, 소설가는 13년 전을 떠올리며 말했다. “해가 있는 동안에는 집에서 소설을 쓰고, 저녁 무렵 오후 네 시 다섯 시 그즈음에는 전철을 타고 용산 참사 현장이었던 남일당으로 갔는데요. 거길 오가면서 쓴 소설이예요. 현장의 참혹함을 대하는 조심스러운 마음, 사람과 사랑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마음이라는 걸 세상에 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소설을 열심히 썼습니다.”

마지막 장 ‘섬’이 낯익었다. 나의 원적지 석모도였다. 7년 전에 석모대교가 놓여 이제 섬 아닌 섬이었다. 강화도 내가 외포항에서 20여분 이면 석모도 돌캐 나루에 닿았다. 소설 속 ‘개펄을 향해 뻗어나간 방파제 위에 나지막한 횟집이 대여섯 군데 문을 열었다.’는 어류정 물량장이다.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초입의 오르막 양편으로 녹두전․나물․막걸리를 파는 허름한 가게들은 보문사 사하촌이다. ‘높고 가파른 암벽에 둥글둥글한 인상의 불상이 양각’은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이다. 주차장과 도로 너머 개펄과 염전은 삼산면 매음리 일대다. ‘이어진 섬들은 송전탑을 하나씩 이고’(160쪽) 내가 살고 있는 서도西島 군도群島에 전류를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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