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배꼽
지은이 : 문인수
펴낸곳 : 창비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래, / 절경만이 우선 시가 된다. / 시, 혹은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 사람 구경일 것이다.
‖시인의 말‖의 1연이다. 시인의 ‘사람’은, 문학평론가 김양헌은 해설 「실존의 배꼽을 어루만지다」에서, ‘꼭지는 우리의 부모나 조부모가 맞닥뜨렸던 혹독한 삶의 실상을 되살려 낸 존재’(106쪽)라고 명명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갑남을녀나 장삼이사보다 더한 현실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있는 존재라고 나는 생각했다.
고갯길 올라가는 독거노인 / 갯벌 조개잡이 할머니 / 미장이 사내 / 경운기 모는 영감 농부 / 횡단보도 무단횡단 할머니 / 파 다듬는 노점 아주머니 / 길거리음식 쓰레기 뒤지는 노파 / 고된 시집살이 큰누이 / 외곽 야산 폐가에 깃든 사내 / 목욕탕을 옮겨 다니는 이발사 / 막일꾼 청년 / 섬에 네 분 뿐인 할머니들 / 산중턱 임시거처의 사내 /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 장애인 / 딸 둘을 키우는 아내와 사별한 젊은 사내 / 외롭게 죽어간 숙모 / 병수발로 일생이 점철된 어머니
시편을 읽어나가다 눈에 밟힌, 시인의 ‘사람’과 문학평론가의 ‘꼭지’와 나의 콧잔등을 시큰거리게 만든 사람들이다. 시인 문인수(文仁洙, 1945-2021)는 1985년 문예지 『심상』 신인상으로 시단에 나왔다. 불혹을 넘긴 만 41세의 늦깍이 등단이었다. 시집은 ‘절제된 언어로 생의 궁벽한 자리에서 아름다운 무늬를 뽑아내 애잔한 감성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평가받았다.
『배꼽』은 일곱 번 째 시집으로 추천사는 시인 황동규의 몫이었다. 4부에 나뉘어 59편이 실렸다. 마지막은 나를 시집으로 이끈 장애인 빈소 풍경을 담은 「이것이 날개다」(84-85쪽)의 1연이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 점심식사중이다. /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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