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아버지의 해방일지
지은이 : 정지아
펴낸곳 : 창비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군립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찾는 이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해가 바뀌어서 나에게 차례가 왔다. 그랬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작가의 32년 만의 장편소설이었다. 1990년 안산공단 화공약품 노동자 시절, 고잔동의 지하방에 널린 몇 권의 책 중에 세 권짜리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이 있었다. 작가가 스물다섯 나이에 처음 활자화시킨 부모의 실록이었다. 소설은 공안 당국의 기소와 판매금지로 한국문학에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작가는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30년 동안 소설모음집만 출간했다. 정말 오랜만에 나온 장편소설로 그만큼 반가웠다. 나는 그동안 문학상 후보작에 오른 단편들을 몇 편 잡았을 뿐이다. 인권 르포르타주 『벼랑 위의 꿈들』이 단행본으로 유일했다. 내 차례를 기다리다,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을 읽었다. 군립도서관에 내가 잡지 못한 작가의 소설집 두 권이 더 있다. 머지않아 손이 갈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다.’(7쪽) 소설의 첫 문장이다. 지리산과 백운산을 뒷동산처럼 누비던 빨치산으로 ‘뼛속까지 유물론자,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죽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3일 간의 장례식장이지만, 해방이후 70년 현대사를 압축한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해방정국에서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총을 들었으나 처참하게 패배했다. 조직 재건을 위해 위장 자수했다. 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에서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이름 덕분에 나는 숱한 홍역을 치렀다.’(29쪽) 소설의 화자話者 고아리의 이름이 지어진 배경이다. 작가 정지아(鄭智我, 1965- )의 부모는 실제 구빨찌 혁명전사였다. 아버지 정운창 선생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이었고, 어머니 이옥남 선생은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부모의 활동 근거지였던 산 이름에서 한자씩 따와 이름을 지었다.
‘자네 ,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12쪽)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엄동설한의 한겨울 아버지는 산골에서 나갈 시간을 잃은 당산나무 밑의 소쿠리 방물장수 여인네를 데리고 왔다. 코딱지만한 방 두 칸짜리 집이지만 그녀를 딸 방에 재 울 작정으로. 어머니가 뜨네기 여인이 딸에게 벼룩이라도 옮길까봐 저어하자, 아버지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여인은 다음날 새벽 떠나갔으나 딸에게 벼룩을 옮겼고, 서까래 밑의 마늘 반접도 사라졌다. 아버지가 말했다. “오죽하면 그깟 것을.” 아버지는 진정으로 민중을 감싸안은 사회주의자였다.
‘빨갱이였던 아버지는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와서도 늘 특별취급을 당했다. 이사를 가면 주소지 경찰서에 미리 신고를 해야 했고, 사나흘 집을 비울 때도 무슨 일로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는지 미주알고주알 알려야했다.“(104-105쪽) 정운창 선생은 2008년 5월 1일 노동절에 돌아가셨다. 작가와의 대담에서 아버지의 혁명노선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민중민주주의(PD)와 생각이 비슷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속해 있던 민족민주주의(ND)는 ’과격한 급진주의자‘라고 비판하셨어요. 어쨌건 아버지는 계급성을 언제나 더 우선에 두셨죠.” 작가는 사노맹 외곽조직 활동으로 3년간 수배생활, 자수를 했고 집행유예를 받았다.
작가는 2011년 5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주년이 되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전남 구례로 내려왔다. 연세가 많으신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아버지의 활동무대였던 백운산 자락에 정착했다. 뒷표지의 추천사는 아나운서 박해진과 소설가 김미월이었다. 소설가의 첫마디는 “소설을 읽고 운 것이 대체 얼마만의 일인가”였다. 그랬다. 소설을 읽어 나가는 내내 코끝이 시큰하고 목울대가 울컥했다. 가끔 책에서 눈을 떼어 창문 밖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마지막 문장이었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세욱의 중국문학기행 (92) | 2024.01.30 |
---|---|
안동소주 (76) | 2024.01.29 |
다른 방식으로 보기 (75) | 2024.01.24 |
배꼽 (64) | 2024.01.23 |
百백의 그림자 (69) | 2024.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