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안동소주
지은이 : 안상학
펴낸곳 : 걷는사람
신천교가 보이는 길목을 지켜선 / 가로수는 하나 둘 가을 흔적을 지우고 /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있는 선거 현수막은 / 가지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 강남약국 앞 버스정류소 무인 판매대에서 / 문득 주워든 때 지난 조간신문 / 사람들이 표표히 떠도는 모습을 배경으로 / 현수막에 붙박힌 무표정한 이름들이 웃고 있다 / 순간 사회면에서 비상하는 철새들 / 왜가리 청둥오리 두루미 고니떼 무리 / 을숙도에 잠시 머물다 북상할 거라는 短信 / 저 썩어 흐르는 신천에도 철새는 날아올까
등단작 「1987년 11月의 新川」의 1연이다. 시인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시인의 시집으로 『아배 생각』(애지, 2008),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두 권을 잡았다. 나에게 시인의 대표시집은 두 번째 시집 『안동소주』였다. 시집은 오래전에 품절 상태였다.
도서출판 《걷는사람》의 복간본 시리즈 〈다:시〉일곱 번째로 다시 나왔다. 복간본 ‖시인의 말‖에서 “스무 해 전에 묶은 시집 『안동소주』(실천문학사, 1999). ‘안동소주’는 오랫동안 내 이름자 앞에 별호처럼 따라다녔다.”라고 했다. 시인 신경림의 발문 「한 두루미의 안동소주 같은······」에서 시인의 등단작 1연을 만났다. 아둔한 나는 그제서야 ‘80년대 어두운 도시 풍경을 묘사’했다는 詩를 검색해서 읽었다.
시인은 등단 36년 동안 여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詩에 문외한인 나는 반수나마 시집을 찾았다. 그것은 ‘시대와의 불화’가 없으면 공연히 시를 적을 이유도 없다. 우리 변방의 슬픈 삶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어떻게 상처를 입는지를 말하는 시인을 믿기 때문이다.시집은 4부에 나뉘어 66편이 실렸다. 표사는 아동문학가 故 권정생 선생, 시인 안도현, 이원규가 글을 부조했다. 선생은 말했다. “사람은 고독할 때만이 자신과 이웃에 대해 진실할 수 있다. 안상학의 시에는 유난히 외로움이 가슴 아프도록 깔려 있다. 외로움을 아는 인간은 그 외로움에 대한 소중함도 안다.”
안동 토박이 시인이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을 맡던 시절, 나는 적은 돈이나마 후원했던 인연도 있었다. 10여 년 전 저쪽의 세월이었다. 가장 친한 동료가 선배의 집을 방문하는데 따라갔다. 선배가 흰 도자기 술병을 꺼냈다. 안동소주라고 했다. 술 욕심이 유별난 나는 경북북부 지방 소도시의 지명을 단 소주를 무턱대고 들이켰다. 술병 바닥이 보일때 쯤, 책상다리를 앉은채로 나는 방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마지막은 「우리가 걸었던 밤길에는 희망이 적이었다」(14-15쪽)의 2․3연이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살진 이빨과 / 날카로운 손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오직 한 줄기 빛 그 바늘구멍을 향해 / 우리가 어깨 겯고 나아가 곳은, 그러나 / 어둠 속에서 빛나던 적들의 안광이었다. // 지금은 적들의 안광 속 / 어둠보다 더 어두운 백야의 길 /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둠보다 더 / 우리들의 발목을 채는 휘황한 거리
p. s 나는 시에서 ‘87년 국민대항쟁’이 이루어낸 ‘절차적 민주주의’가 또다르게 ‘절대적 자본주의’ 시대로 기울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마디로 죽 쑤어서 개 준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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