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오직 사람 아닌 것
지은이 : 이덕규
펴낸곳 : 문학동네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놈이었습니다』(문학동네, 2015)
『오직 사람 아닌 것』(문학동네, 2023)
내 책장에서 어깨를 겯고 있는 시인 이덕규의 시집들이다. 한때 나는, 아니 지금도 농업․농촌․농민시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나에게 신경림의 『농무』이후 가장 뛰어난 농촌시를 꼽으라면 단연 이덕규였다. 시인은 1998년 「양수기」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모태농부였던 그는 토목기사를 그만두고, 고향 경기 화성에서 농사와 시를 짓고 있다.
나에게 시인이 뇌리에 박힌 것은 첫 시집의 자서自序 때문이었다. 시인이 스무 살 대학생 시절, 방황할 때 섬진강변 압록역 대합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어떤 손 하나가 호주머니 속에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넣어주었다. 그 밑천으로 시인은 여기까지 왔다.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은 이렇게 끝맺었다. ‘캄캄한 무논을 갈아엎는 심정으로 당신의 빛나는 발자국을 따라가겠습니다.’
『오직 사람 아닌 것』은 4부에 나뉘어 58 시편을 담았다. 시인 이순현은 해설 「발굴하는 자와 발굴되는 자」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다. 농촌의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여 상투성과 고정관념에 빠지기 쉽지만,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새롭고 낯선 미적 지평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125쪽)고 평했다.
「입동」(39쪽)은 자신의 직분과 능력이 다했을 때 미련 없이 떠났다가 때가 되면 다시 돌아와 그들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오직 사람 아닌 것들’의 안부를 궁금해 했다. 이어진 시편 「가을걷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빈손으로 떠난 오직 사람 아닌 것들의 목록」(40쪽)이다. ······ 거미, 개구리, 우렁이, 미꾸라지, 거머리, 맹꽁이, 두꺼비, 소금쟁이, 소아재비, 방개, 새갱이, 징거미, 송곳자리, 물자라, 웅어, 장어, 털게, 송사리, 버들치, 구구락지, 참붕어, 메기, 가물치, 땅강아지, 잠자리, 뜸부기, 물닭, 논병아리, 참새, 오리, 백로, 왜가리, 들쥐, 무자치, 메뚜기, 사마귀, 방아깨비······. 마지막은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낯이 익은 감동적인 시편 「그 밤으로 가는 달구지」(18-21쪽)의 2연이다.
갑자기 머리 쪽으로 중심이 기운다 / 언덕을 내려가는 거다 달구지 위에 누워서도 나는 어디쯤 왔는지 다 안다 / 조금만 더 가면 냇갈을 건너는데 / 쇠들보 아래 뚝심 좋은 아버지들이 돌멩이를 물속에 던져 넣어 만든 돌다리를 건널 것이다 / 밀짚모자를 쓴 아버지가 소를 몰며 / 구수하게 피우는 담배 연기가 어두워지는 허공에 파랗게 흩어진다 /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엄마가 타박타박 달구지 뒤를 따라온다 / 드디어 물을 건넌다 / 차르륵차르륵 달구지 바큇살에 냇갈 물 감겨 올라오는 소리, 누렁이 목에서 울리는 핑경 소리, / 큰 돌멩이를 밟았는지 달구지가 크게 기우뚱거린다 / 나는 그 돌을 안다 / 뽑을 수 없어서 그대로 박혀 있는 돌, 동네 사람들이 한 번쯤 다 만져본 돌, 주변 돌들을 꽉 잡고 있는 / 큰댁 형님처럼 믿음직한 돌 / 이곳을 건널 때는 바짓단을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건너편 키 큰 미루나무를 보고 똑바로 가면 된다 / 가끔 냇물이 섭섭하다고 바짓단을 살짝 적시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