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대빈창 2024. 3. 13. 07:00

 

 

책이름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지은이 : 박철

펴낸곳 : 문학동네

 

나의 뇌리에 시인 박. 철.(朴哲, 1960 - )이 각인된 것은 시인의 첫 시집 『김포행 막차』(창작과비평사, 1990) 때문이었다. 시집이 나온 지 15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어느 문학평론집에서 표제를 보았다. 까까머리 고교시절, 낭만적 객기의 분출구로 영등포 뒷골목을 헤매던 촌놈의 자화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비까번쩍하는 도시의 네온사인 불빛아래 값싼 희석식 소주에 취해 흐느적거렸다. 어쩔 수없이 '김포행 막차'를 타야했던 아련한 향수 때문이었을까. 어렵게 시집을 손에 넣었다.

시인은 1987년 『창비 1987』에 「김포 1」외 14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나는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를 만났다. 2010년 제12회 백석문학상 수상시집이었다. 그리고 소설집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실천문학사, 2006)를 잡았다. 여기서 록스는 호주 시드니 최초 이민자 마을이었다.

 

차라리 나 돌아오지 말고 / 오세아니아에 살걸 / 오세아니아 대륙 떠돌다 / 캥거루 뒷발에나 채일걸 / 거기 원시의 낙엽 속에 한줌 흙 될걸

 

「허공을 떠도는, 둥글고 둥글지 않은 부표」(50-51쪽) 2연의 일부분이다. 「퀸스 강」(85쪽), 「숲」(118쪽)에도 호주가 언급되었다. 시인은 한때 호주 이민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시인의 대표시는 어디선가 눈동냥했던 낭만주의자 시인의 허술한 생활력을 그린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였다. 시집은 6부에 나뉘어 75편이 실렸다.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해설 「‘격정’의 끝에서 노래하는 마지막 ‘희망’」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시인적 감각의 진솔함으로 가득”(135-136쪽)하다고 평했다.

군립도서관에서 대여한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문학동네, 2001)는 초판 1쇄였다. 시집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나서 손에 들었다. 문학출판사 《문학동네》의 복간 시집 시리즈 ‘문학동네포에지 78’로 2023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마지막은 강화에 터를 잡은 하종오 시인과 김포 출생의 시인 박철이 걸음을 함께 한 「통진 지나 강화」(52-53쪽)의 일부분이다. 김포 통진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 / 하종오 시인과 통진 지나 강화로 간다 / 노후를 위해 어렵게 마련했다는 촌가 / 백운 이규보의 무덤 근처 외딴집 / 그나마 아들이 대학 가면 팔아야 할 것 같다는 / 선배 시인의 수심을 들으며 서해로 간다 / ······ / 살다 보니 이 땅의 시인이 되고 / 살다 보니 통진 지나 강화로 오고 / 살다 보면 꿈도 멀지 않으리 / 그런 되지 못한 생각으로 오후를 보내다가 /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채 다시 / 통진 지나 서울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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