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안개가 섬을 깨운다

대빈창 2011. 4. 11. 05:42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밤새 안개가 점령군처럼 섬에 주둔했습니다. 얼마나 심한지 「물방울의 화가」 김창열의 그림처럼 방충망은 맺힌 물방울로 가득했습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무진의 특산물 안개와 요절시인 기형도의 샛강의 자욱한 안개 못지않게 주문도의 안개는 주민들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안개는 주문도에 봄이 온 것을 알리는 전령입니다. 해토가 되면서 대지가 뱉어낸 물기 입니다. 날이 차거나 바람이 나야 안개는 물러 납니다. 정분난 봄처녀와 달리 날씨는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하고 푸근합니다. 봄햇살을 만끽하기는 커녕 안개가 온통 섬을 점령했습니다.

요즘 기상나팔 소리는 트랙터와 경운기 엔진음 입니다. 축축한 안개가 휘감은 대기를 뚫고 들려오는 기계음은 날카로운 금속성이기보다 묵지근한 고동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봉구산 자락에 널린 밭은 거의 고구마와 고추가 심겨집니다. 이른 아침부터 밭을 갈아 고랑을 세우고 이랑을 켜고 비닐을 씌우는 농부들의 손길은 쉴 여력이 없습니다. 논에 물을 대고 트랙터로 땅을 갈고 써레질을 하느라 부지깽이 손도 빌릴 지경입니다. 농사는 때가 있는 법 입니다. 시기를 놓치면 일년농사가 도로아미타불 입니다.

날이 풀리면서 바닷일의 동안거도 풀렸습니다. 수온이 오르며 바닷고기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뻘그물에 숭어와 농어가 찾아들고, 소라방에 주꾸미가 알을 품으러 몸을 숨깁니다. 농어잡이 낚시배인 선외기도 엔진 점검으로 몸을 추스립니다. 찬 기운에 갯벌 깊숙이 몸을 움추렸던 조개들도 바닷물이 따듯해지자 갯벌 표면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조개잡이는 안개를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바다에서 갑자기 사위를 휘감는 안개를 주민들은 '골안개'라 합니다. 조개잡이 나갔다가 골안개가 밀려들면 방향을 구분할 수 없어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갯골로 물이 먼저 밀려 들어 바닷물에 포위되기 쉽상입니다. 노련한 어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골안개 입니다. 눈 앞의 여도 뜨이질 않아 옴짝달짝 할 수 없습니다.

섬을 뒤덮은 안개로 아침배가 결항했습니다. 섬은 고립되었습니다. 아침산행에 나섰습니다. 아! 고작 해발 146m의 봉구산 정상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발아래 섬은 두터운 안개이불에 덮혔는데, 산정은 봄햇살로 밝기 그지 없었습니다. '골안개'의 민첩성과 도발성과 무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외딴섬에 봄기운과 함께 안개가 밀려듭니다.

어린 찔레 새순이지만 짙푸릅니다. 생강나무의 샛노랗고 자잘한 뭉텅이 꽃들이 마른 숲에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소나무의 어린 새순은 연두빛을 띠었습니다.  침엽수 소나무도 나뭇잎을 떨굽니다. 소나무 둥치에 솔가리가 무성하게 쌓였습니다. 인적 뜸한 산기슭에 무리진 달래가 푸른 양탄자를 깔아 놓았습니다. 발밑의 산길도 누렇고 바랜 마른 풀에서 하루가 다르게 녹색의 점유율을 높였습니다. 일년 중 가장 산길을 걷기 좋은 계절입니다. 한파와 유빙에 몸을 움추렸던 섬에 봄이 돌아왔습니다. 느리게 흘러가다 고여 있던 섬의 시간이 초침을 째깍입니다. 안개속 농부들의 활기찬 손놀림이 섬을 깨웠습니다. 노란  니켈 가로등이 노곤한지 설핏설핏 졸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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