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대보름을 스케치하다

대빈창 2011. 2. 26. 03:55

 

 

 

주문도의 큰 마을인 진말에서 연례행사인 대보름맞이 척사대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찬조금을 들고 윷놀이가 열리는 마을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떠들석한 흥청거림은 고사하고 쓸쓸하다 못해 허허롭기까지 하였습니다. 노인회장님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보입니다. 병막걸리와 종이컵, 안주는 돼지고기 수육입니다. 행사의 주최자인 마을 청·장년회 회장님과 총무님은 이른 해장술로 벌써 얼굴이 화로를 뒤집어 쓴 것처럼 활활 타올랐습니다. 물에 적신 가마떼기 대신 길게 늘인 보온덮개가 윷판입니다. 남정네보다 아줌마들이 더욱 눈에 뜨입니다. 동네 유일의 구멍가게인 '신성상회'의 간판이 햇빛에 바랜 것처럼 농촌공동체가 자랑하던 마을잔치의 왁자지껄함이 사라졌습니다. 애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이 사라진 이후의, 오늘날 이 땅의 허허로운 농촌 사정입니다. 한판 놀다 가라는 이장님의 성화도 있었지만 바쁜 척, 사례품인 수건만 들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절기는 속일 수 없습니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우수가 지나면서 거짓말같이 사라졌습니다. 질척질척한 벌판을 까마귀떼가 뒤덮었습니다. 폭설로 알곡을 찾지못해 굶어죽은 기러기떼 사체가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서도는 구제역 파동없이 겨울을 났습니다. 청정한 서해의 외딴 섬들은 오염되지 않은 지하수를 여전히 식음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사람사는 4개의 유인도에 우제류는 총 12마리만 살고 있습니다. 흑염소-10마리, 꽃사슴-2마리가 전부입니다. 꽃사슴은 보문사로 유명한 석모도의 사슴농장에서 구제역을 두려워한 농장주가 볼음도 친구한데 선물한 것 입니다. 저는 처음에 당나귀도 우제류 가축인 줄 알았습니다. 볼음도에는 우습게도 당나귀 2마리가 있습니다. 다행히 당나귀는 기제류로 구제역과는 상관 없습니다. 대보름 다음날 후배와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배 어제 보름달 봤어요. 우측 하단이 찌그러져 있던데' 그랬어! 하면서 나의 기억 테이프는 빠르게 리와인드되고 있었습니다. 

대보름 전날 초저녁. 東山(동산) 위로 떠오른 멧방석만한 대보름 달을 보며 어린 나는 소원을 빕니다. 어머니가 등뒤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의 나를 두팔로 감싸안은 채 달님을 보며 불붙은 짚단을 위아래로 서너번 흔듭니다. '다님, 다님. 우리 막내 올해도 병치레 없이 무사하기를 이렇게 다님께 비옵니다.' 나는 어머니의 손짖을 따라 불이 사그라드는 짚단을  이리저리 뛰어 넘습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가래떡을 짚불에 구워 먹습니다. 좀더 머리통이 커서는 불싸움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애들 특유의 위악성이 마을 대항 불싸움을 더욱 치열하게 만듭니다. 잘마른 소똥을 불쏘시개로 우겨넣은 불깡통을 휘드르다 공중에 던지면 불싸움이 시작됩니다. 훨훨 타오르는 짚불을 둘러싸고 마을 형들이 작전을 짭니다. 벌판을 사이에 둔 건너마을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다, 장대를 꼬나들고 벌판 한가운데서 대보름 대항 불싸움을 벌입니다. 지금 회상하면 무모하고 미련하기도 했지만, 싸움에 있어 사람이 다치지 않는 서로간의 묵계가 잘 지켜졌습니다. 논두렁을 태우는 쥐불놀이, 꽁꽁 언 대파를 캐 짚불에 구워먹던 알싸한 맛. 마을 어르신들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절을 올리면 권하던 귀밝이술. 부스럼 나지 말라고 깨뜨리던 부럼(호두, 땅콩, 밤등). 대보름날 잠을 자면 눈썹이 희게 변한다는 금기에 천근만근 감기는 눈꺼풀과 씨름합니다. 9가지의 나물과 오곡밥으로 배를 채우고, 늦은 밤중까지 수다 떠는 누나들의 신발을 몰래 감추는 짖궂은 장난으로 밤을 새웁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게 변했습니다. 예전보다 사람들의 삶이 풍요롭고 편리해졌다고 누구나 말들 합니다. 그런데 왜 가슴 한구석이 허허롭기만 할까요.

'대빈창을 아시는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개가 섬을 깨운다  (0) 2011.04.11
토건국가의 녹색성장  (0) 2011.03.25
바다, 바닥을 드러내다  (0) 2011.02.23
섬의 시간은 고여 있다  (0) 2011.02.01
얼음 나다 또는 뜨다  (0) 2011.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