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간은 정오를 막 넘어서고 있습니다. 겨울답지 않게 방안은 환한 빛으로 가득 합니다. 방바닥의 터럭 한올도 금방 눈에 뜁니다. 제 방은 이중창문인데도 밖의 환한 빛 알갱이들이 축제처럼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찾을 수 없는 빛의 향연입니다. 이중 창문을 열어 젖힙니다. 유리창에 고사리 문양의 성에가 가득합니다. 밖의 기온이 많이 내려 갔습니다. 안팎의 기온차로 유리창에 결빙현상이 나타난 것 입니다. 밖의 창을 열어 젖힙니다. 섬은 눈나라가 되었습니다. 한자가 넘게 쌓인 눈이 쏟아지는 햇빛을 난반사시킵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환한 것이구나! 일주일 전 작은 섬 주문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습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람 한점없이 곱게 쌓인 눈은 20cm가 넘었습니다. 제가 플라스틱 자를 들고나가 직접 젠 기록입니다. 어릴 적 겨울은 눈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눈이 온 날은 저의 삶 중에서 세 손가락안에 들 것이 분명합니다.
작은 외딴 섬의 겨울은 눈 속에 잠겨 있습니다. 도회지처럼 부리나케 눈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생계의 전부가 농사와 고기잡이인지라 겨울은 어느 계절보다 한갖지기 그지 없습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 그리고 배가 닿은 선창길만 그럭저럭 눈치기 흉내를 냈습니다. 겨우내 쌓인 눈이 한 자가 넘습니다. 아스콘이나 콘크리트 길의 눈은 빨리 녹습니다. 하지만 흙에 내린 눈은 좀처럼 녹질 않습니다. 여기서 자연의 포용력을 생각하는 저의 사고가 비약이 심한 것일까요. 휴일 한 주만에 산을 올랐습니다. 평소처럼 산길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눈길을 헤쳐 나가는 악전고투였습니다. 30분이면 족할 산행이 1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이른 아침 산을 오르는 주중을 생각해서 눈밭에 길을 새로 내기 때문입니다. 산정에 고라니 발자국이 어지럽습니다. 정상의 소용돌이 치는 돌풍이 쌓인 눈을 휘날려 그런대로 마른 풀이 드러났습니다. 능선과 골짜기를 파묻은 폭설에 먹을 것이 궁한 녀석들이 산정까지 올라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녀석들의 발자국이 텃밭 울타리에 머물렀습니다. 한겨울에도 풀내가 나는 사철나무 잎이 굶주림에 지친 녀석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폭설로 가장 큰 곤욕은 산짐승과 날짐승에게 닥쳤습니다. 모두 눈에 가려 먹을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수확이 끝난 늦가을부터 들녘에서 흘린 알곡을 주워 먹던 기러기와 오리도 매한가지 였습니다. 얼마나 곤궁한지 기러기 떼가 양지바른 고구마밭을 헤집습니다. 참나! 기러기가 잔챙이 고구마를 주워 먹다니. 물이 급한 오리도 허둥댑니다. 저수지가 꽝꽝 얼어 붙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녀석들은 수렁 논을 찾았습니다. 한겨울에도 더운 김을 뿜어 올리는 수렁에서, 교대로 녀석들은 몸을 담그는 온천욕을 즐깁니다.
년초부터 이상기후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북반구는 한파와 폭설로, 남반구는 홍수로 난리 입니다. 아니 이상기후라는 말이 우습게 들립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천재지변은 일상화 되었습니다. 작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겨울은 폭설과 한파, 봄은 냉해, 여름은 폭염과 태풍, 가을은 황사로 자연재해의 연속 이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강도는 더욱 심해질 것 입니다. 눈속에 파묻힌 서해의 작은 외딴 섬의 시간은 고여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이 온 후 고라니들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몸을 움추린 채 집에 틀어박혔습니다. 모든 생명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다 멈출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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