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을 먹고, 마루로 올라서는 댓돌에 엉덩이를 걸치고 낡은 등산화의 끈을 조입니다. 산행을 눈치 챈 어머니가 한마디 하십니다. '대빈창으로 가지 그러냐.' 근래 내린 눈으로 산길이 미끄러울 것이라는 어머니의 염려스런 걱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새해 첫 해돋이를 바닷가에서 맞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동해라면 모를까요. 서해에서는 오히려 한 해의 지는 해를 작별하는 것이 어울리겠지요. 그리고 저의 산행은 근 일주일을 머뭇거렸습니다. 연말의 계속되는 술자리와 퍼붓는 눈발로 산에 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바다로 향하는 길을 버리고, 산길로 들어서면서 저는 서산대사의 선시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눈길을 처음 갈 때는 발자국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는. 하지만 산길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습니다. 아하! 동네 어르신들이 농협을 찾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선창이 있는 느리마을에는 면사무소, 보건지소, 파출소 등 행정기관이 자리잡고, 주문도의 큰 동네인 산너머 진말에 금융기관인 우체국과 농협이 있습니다. 서해의 외딴 섬 주문도에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등산화의 발등을 쌓인 눈이 덮습니다. 산허리에 걸쳐친 경사가 완만한 진말가는 지름길을 버리고 저는 본격적인 산행에 오릅니다. 산정까지 오르는 길은 크게 세 구비를 돌아야 합니다. 한 구비를 돌아서자, 사람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라니를 비롯한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산길을 가로질러 숲 속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토끼 띠 입니다. 발자국 주인 중에는 분명 산토끼도 있을 것 입니다. 두 구비를 돌자, 경사가 급한 지라 산짐승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고비인 산정을 앞둔 가파른 경사를 가쁜 숨을 내 쉬며 급하게 발걸음을 내 딛습니다. 해발 146m의 봉구지산 정상입니다. 그러고보니 산을 오르면서 저는 고라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온통 눈천지인 산속에서 녀석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일출을 찍으려 챙긴 디카를 꺼내 듭니다. 진말 쪽 산사면은 급하게 떨어 집니다. 눈아래로 진말 들녘이 펼쳐지고, 바다를 향해 길쭘하게 뻗은 '살곶이'를 무인도 수섬이 마중나오고 있습니다. 물이 빠진 뻘과 푸르름이 채 가시지 않은 대기가 혼탁한 뒤섞임으로 어울립니다. 곱은 손을 입김으로 녹이면서 셔터를 계속 눌러댔으나 그림이 마음에 차질 않습니다. 새해 첫날 일출치고는 너무 싱겁습니다. 탁한 감청색 구름띠 위쪽에 엷은 분홍 기운이 번져 갑니다. 아! 이제 해가 떠오르는구나. 하고 눈을 크게 뜹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붉은 기운의 중심에 10원짜리 동전만한 해가 박혀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눈길을 헤치며 산정까지 올랐는데 좀 허탈해졌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산길의 가운데를 밟으며 내려 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산행에서는 오히려 피한 자리였습니다. 가운데는 키 큰 잡풀이 우거졌기 때문에 맨 땅이 드러난 길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쌓인 겨울 산행에서는 마른 잡풀이 눈위로 고개를 내밀어 길 안내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눈 내린 들판을 밟아 갈 때에는 /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라. / 산을 내려오자마자 인터넷 검색을 합니다. 서산대사의 선시 전문입니다. 선각자의 자기 사명을 암시하는 고승의 선시보다, 눈 속에서 고개를 내민 마른 잡풀의 삶이 가슴에 와닿는 하루였습니다. 새해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연로하신 어머니가 몸이 아프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벽걸이용 달력을 교체 합니다. 매년 신영복 선생님의 서예 달력을 바라보며 나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올해는 판화가 이철수의 '그림으로 쓴 선시' 달력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빨간 형광펜으로 한 구석 여백에 작은 다짐을 적습니다. '禁酒' - 달력을 넘기면서 두 글자를 새기겠죠. 12월달 대견스런 마음으로 마지막 '禁酒'를 쓰기를 바랄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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