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입 속의 검은 잎
지은이 : 기형도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집'의 전문이다. 20여년 저쪽의 세월, 그 한토막을 정확히 기억하기란 불가능 할 것이다. 60시편이 실린 시집을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 뒷표지를 덮으면서 바로 이 시라고 나는 단정 지었다. 80년대의 마지막 해 초여름 어느날이었다. 만물이 생동하고 꽃들이 만개하고 날씨는 화창한 그날 일군의 문청들이 거나하게 막걸리에 취해 있었다. 어떤 연유였는 지 평소 별로 어울리지 않던 그들과 나는 외떨어진 문우의 자취방에서 상춘의 기쁨을 취중에 실어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낯선 이름이 불려 나왔다. 기. 형. 도. 그러자 좌중의 분위기가 일거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가 슬픈 어조로 시를 읊었다. 정확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몰입된 사랑을 갈구하던 불쌍한 청춘들이 읊을만한 시면 족하다. 하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자식들! 이 엄혹한 시절에 시나 읊조리고, 사랑타령이나 하다니. 문우들의 가난한 의식이 불쌍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나는 공장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입 속의 검은 잎'의 초판 1쇄 발행일은 1989년 5월 30일이다. 그렇다면 그때 한 자리에 모여있던 문청들은 거의 이 신간시집을 잡았다는 소리다. 시인은 1985년 '안개'로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시인은 첫 시집을 상자했으나, 출간을 보지 못하고 1989년 3월 서울 종로의 심야 극장에서 뇌졸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러기에 이 시집은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되었다. '요절의 비극성이 神話로 증폭'된 것일까. 그 시절 문청들에게 '시인은 통과의례이자 열병'이었다. 시를 쓰려는 자, 아니 쓰는 자들은 기형도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시인은 넘어서야 할 산이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존재'였다. 여기서 기형도는 '한국 시단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신화'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20년 되는 시점에 시집은 무려 65쇄를 찍으면서 24만부가 팔려 나갔다. 이 추세는 쉬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 시가 존재하는 한. 그때 문청 동료들과 요즘들어 연락이 닿았다. 머리가 벗겨지고 뱃살이 늘어질 나이인 요즘 그들은 기형도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한달에 한번 만나는 술자리에서 그 시절처럼 '시대의 억압으로 인한 사회적 공포'를 상징하는 기형도의 시를 즉흥적으로 읊을 수 있을까. 순수한 열정이 살아있던 그들. 지리멸렬한 일상에 침잠된 그들을 만난다는 일이 낯설다. 시인이 타계한 지 20년도 지난 지금에야 나는 시집을 펼쳤다. 한국문학의 거목 평론가 김현은 이 시집을 이렇게 평했다. '그것은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부정성을 그 이전에 보여준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 그런데 기형도의 시엔 그런 낙관적인 전망이 거의 없다.' 그렇다. 희망이 보이질 않는 암울한 현실에서 무책임하게 희망을 노래할 수는 없다. 시인의 시에 故 김현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이름 붙였다. 이 땅의 그로테스크함은 숙제를 하며 엄마를 기다리던 소년이 어언 청년이 되었는데도 OECD 국가 중 최고의 20대 자살율을 자랑하는 암울한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 시집의 마지막 시 '엄마 걱정'의 전문을 덧 붙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0) | 2011.04.22 |
---|---|
雜說品 (0) | 2011.04.20 |
유전자 조작 밥상을 치워라! (0) | 2011.04.04 |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 (0) | 2011.03.21 |
히스패닉 세계 (0) | 2011.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