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옛길
지은이 : 안치운
펴낸곳 : 학고재
오래 묵은 책이다. 내가 세 번째 잡은 책은 1999년 초판본이다. 2003년 《디새집》에서 사진을 보충한 개정증보판으로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로 출간되었다. 초판이나 개정증보판 모두 절판되었다. 연극평론가 안치운(安致雲, 1957- )은 70년대 중반 대학시절, 암울한 세상에 분노하며 산에서 떠돌았다. 그에게 산행은 도피처․인생의 스승이었다. 책은 6장으로 구성되었다. 1-5장은 우리 땅 골 깊은 오지를 찾은 저자의 ‘경험’과 ‘사유’를 유려한 문체로 담았다. 6장은 ‘서재의 등산학’이었다.
1장 ‘정선에서 영월로, 동강을 따라’, 여행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 글을 쓰는 것은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파편화된 자신의 흔적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 세상의 환난을 겪지 않을 곳처럼 들리는 곳, 하나의 결핍도 없는 전체성으로 여겨지는 곳 정선과 영월. 이 땅은 좁지만 깊은 곳에 정신의 자리가 있다. 정선과 영월을 잇는 산줄기는 동강, 동강의 백미는 백운산을 끼고 펼쳐지는 소솔에서 문회마을까지의 풍경. 나루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강의 굴곡이 심하다는 것이다.
2장 ‘곰배길에서 강선리가는 옛길’, 억새가 거센 바람에 버틸 수 있는 것은 밑바닥이 저마다 달라 바람의 힘을 받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길은 오랜 세월동안 인내하면서 제 모습을 지니게 되고, 걷는 이의 발아래에 놓이면서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겸손으로 쓸모있게 되는 것. 점봉산(1424미터)의 해발 800미터에 자리 잡은 강선리가는 길은 한 사람이 겨우 걸어 갈 폭을 지닌 숲속의 길, 옛날 사람들이 설악산과 점봉산 그리고 가리산을 피해 돌아가야 했던 삶의 숨결이 담긴 길.
3장 ‘대골과 아침가리의 추억’, 도시에서 살다 숲속으로 가면 먼저 길이 나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낯선 숲에 들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안한 요소를 발견하기 때문. 산에 사는 이들이 말을 적게 하거나 어눌하게 말하는 것은, 보는 것이 자연의 상징들인 풍경이기 때문.
4장 ‘소백과 태백사이 의풍리 옛길’,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 양백지간은 하늘이 가르쳐 준 전국 제일의 가거지可居地. 의풍리는 산 속의 섬같은 마을로, 마을에 닿기 위해서는 옛길를 골라야 한다. 산골에서 오래 산 이들은 거리는 반나절, 하루 걸릴거야 희미하게 말하지만 길의 방향과 이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들은 모든 길을 돌고, 헛된 시도와 나날들을 경험한 후 지금 여기 와 있기 때문. 문제는 속도에 미쳐, 방향을 모르고 헤매는 우리의 헛된 길이다.
5장 ‘회목고개와 조무락골 살던 사람들’ 가난으로 정신의 실체가 변형된 이들의 삶을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다면, 정신이 가난의 실제를 받아 들여 사는 이들의 삶을 산에 가서 볼 때가 있다. 사람들은 짐승들이 다닌 흔적을 따라 걸었고, 그것이 길이 되었다. 동물들이 다닌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화전민 정리사는 화전민들이 자립 자족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박탈하고 그들을 도시의 빈민으로 예속시킨 화전민 멸종사였다.
6장 ‘산과 자연에 관한 책 읽기’, 사람의 역할, 자연과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해 말하는 인상 깊었던 책들에 관한 서평. 산에 살고, 죽은 한국 산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은 박인식의 『사람의 산』(말과글, 1988), 내가 잡은 책은 개정증보판(바움, 2003). 산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저자가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띄워 보낸 편지묶음 전우익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 1996/증보판), 내가 잡은 책은 (현암사, 2015/출간 25주년 기념판). 속도주의 신화를 전복시킨 이반 일리치의 책을 박홍규가 편저 『에너지와 혁명』(형성사, 1990), 군립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대여한 옮긴이 신수열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사월의 책, 2018). 일본 고대 건축물을 보수하는 대목수 니시오카 츠네카즈의 삶의 철학을 담은 최성현 옮긴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삼신각, 1996), 내가 잡은 책은 재출간본 『나무에게 배운다』(상추쌈, 2013). 사회학자가 환경정치, 녹색정치, 그리고 환경사회학을 말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이 땅의 환경위기, 정수복의 『녹색대안을 찾는 생태학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1996)은 아쉽게 절판되었다.
저자는 말했다. “기억에 남아있는 부엌의 군불, 들판의 모닥불, 마을과 터의 옛이름, 옛길의 아름다움과 순박한 사람들이 날 사로잡았고, 글을 쓰게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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