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섬진강

대빈창 2024. 5. 8. 07:00

 

책이름 : 섬진강

지은이 : 김용택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오래 묵은 시집이다. 초판은 1985. 1. 5. 이었다. 나의 책장에서 오랜 세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시집은 1995. 12. 20. 개정6쇄였다. 4-H 야영대회 피날레는 시낭송이었다. 어둠이 드리워지고, 야영장 이곳저곳 캠프파이어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거대한 나무 꼭대기에서 4-H를 상징하는 모형 솜뭉치가 불타오르며 서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남녀 대표가 한 구절씩 번갈아가며 시를 낭송했다. 물론 농업․농촌․농민시였다.

판권으로 보아 1996년 행사였을 것이다. 담당선생은 나에게 시를 선選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프린트해 넘겼다. 윗선에서 제동이 걸렸다. 그들에게 詩는 관념적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읍내 서점에 둘렀고, 김용택의 첫 시집 『섬진강』을 만났다. 행사가 끝났고, 담당선생은 시집을 나에게 넘겼다. 30여년 저쪽의 세월이었다. 책장의 시집 중 가장 묵은 시집이었다. 내가 잡은 시인의 책은, 부피가 얇은 양장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조무래기들이 섬진강에서 물장구치다 징검다리 위에서 알몸을 말리는 인상적인 표지 두 권짜리 『섬진강 아이들』, 농촌의 풍광과 늙어가는 어머니의 생에 대한 애틋한 헌사 『김용택의 어머니』가 전부였다.

오랜 세월 책장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 재출간본 『제비는 푸른 하늘을 다 구경하고』를 꺼내들었다. 「섬진강 16 - 이사」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시집은 1부 섬진강 연작시 20편, 2부 18편, 3부 13편 모두 51편이 실렸다. 198쪽으로 시집이 제법 두터웠다. 시편들은 해체되어가는 농촌공동체의 현실을 아프게 투시했다. 문학평론가 故 김도연(1952-1993)은 「우리 시대의 토박이」에서 말했다. “농촌의 실상을 농촌의 언어로 사실에 가깝게 증언”한 시집이라고. 표사는 문학평론가 염무웅․최원식, 소설가 황석영이 부조를 했다. 시인 김용택(金龍澤, 1948- )은 198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마지막은 등단작으로, 시집을 여는 첫 시 「섬진강 1」(6-7쪽)의 전문이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 쌀밥 같은 토끼풀꽃, /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 그을린 이마 훤하게 / 꽃등도 달아준다 /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 고갯짓을 바라보며 /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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