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대빈창 2024. 7. 3. 07:00

 

책이름 :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지은이 : W. 칸딘스키

옮긴이 : 권영필

펴낸곳 : 열화당

 

“제목만 봐도 어려운 책이네요.” 그랬다. 뒷좌석에 아무렇게 던져져있던 책을 발견하고 그들이 한 말이었다. 그 시절, 나는 관음도량 보문사로 유명한 석모도에 있었다. 금요일이었다. 주말 집에 가기 위해 그들은 면소재지에서 나의 차를 얻어 탔다. 석모대교가 놓이기 전, 돌캐나루에서 외포항으로 도선이 오갔다. ‘개정판1쇄 1998. 1. 1’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라는 이름에 끌려 인천 부평의 《한겨레 문고》에서 직접 고른 책이었다.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은 없다. 그 시절, 나는 누구보다 조급했고, 진득하지 못했다. 내동댕이치고 다른 책을 집어 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독서는 끔찍하게 지지부진했다. 추상미술의 거장이라는 아우라에 책을 골랐을까. 아니면 옮긴이가 낯이 익었을까. 『실크로드의 미술』이 눈길을 끈다. 새삼 책장을 둘러보니 출판사 《열화당》의 미술서가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도판이 풍부한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을 텐데.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책을 손에 넣기까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튼 책술에 먼지가 뽀얗게 뒤집어쓴 책을 25여년 만에 다시 손에 들었다. 하지만 자신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책은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 교수 시절로 1910년에 펴낸 『점․선․면』을 잇는 이론서였다. 칸딘스키는 최소한 십년 이라는 세월동안 노트를 모았다. 마흔 살이 되던 해인 1910년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1912년에 출간되었다. 추상미술 원리를 독창적으로 체계화한 이론서였다.

책은 ‘일반론’과 ‘회화론’, 결론으로 차례졌다. 부록Ⅰ은 칸딘스키 산문시 8편. 부록Ⅱ는 칸딘스키 평전으로 막스 빌의 「칸딘스키 저서의 배경」, 니나 칸딘스키의 「칸딘스키의 회화발전에 관한 고찰」, 줄리아․리오넬 파이닝어의 「바우하우스 시절의 칸딘스키」, 옮긴이 권영필의 「나의 칸딘스키 편력―특히 중앙아시아 미술과 관련하여」, 칸딘스키 연보로 구성되었다. 칸딘스키 그림은 〈활쏘는 기마인들〉1909, 〈즉흥 19〉 1911, 〈회상〉 1924, 〈인상 5〉 1911, 〈즉흥 18〉 1911, 〈구성 2〉 1910. 여섯 점이 실렸다.

십여 년 전 W. 칸딘스키의 탄생 148주년을 맞아 검색엔진 구글은 메인화면에 칸딘스키의 〈구성 8〉 1923.을 띄웠다. 그림은 원, 대각선, 지그재그 곡선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이고 감정적인 본능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구상화에 중독된 나에게 몹시 낯설었다. 그런데 뇌리 한 구석에 십여년 전에 보았던 그림이 또렷하게 남아있다니. 칸딘스키의 삶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서른 살(1896)때, 안정적인 도르파트Dorpat 대학의 교수직을 사양하고, 뮌헨으로 옮겨 그림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추상회화 이념을 음악의 세계와 연결시켰고, 하나의 색이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고유한 기능에 대해 서술했다. 칸딘스키의 깊은 예술적 발상과 풍부한 문학적 표현이 돋보인 저서로, 그의 예술에 관한 관찰과 감정체험이 담겼다. 여전히 책은 나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책을 세 번째 손에 들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구성은 색채와 소묘적 형태를 통합하는 것인데, 이러한 통합은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또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 도출되며,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공통적인 생명에서 소위 그림이라고 하는 전체를 형성시킨다.(104-105쪽)

우리는 형상을 관념적 화면(Fläche) 위에서 그려내려고 애써왔다. 물론 이때의 관념적 화면이란 것은 캔버스의 물질적 평면에 앞서서 형성해야만 하는 것이다.(106쪽)

예술가는 무엇인가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릇 예술가의 임무라는 것은 형식을 지배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데 있기 때문이다.(129-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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