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따뜻한 흙

대빈창 2024. 7. 5. 07:00

 

책이름 : 따뜻한 흙

지은이 : 조은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리얼리즘 사진가 故 최민식(1928-2013) 선생과 함께 작업한 포토에세이집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샘터, 2004)의 짧은 글들이었다. 시인은 사진가의 수백 컷 사진에서 세심하게 고른 사진에 글을 입혔다.

시인 조은은 1988년 『세계의 문학』에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로 등단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묵시론적 통찰을 보여 준 시편들이라고 했다. 《군립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의 시인을 검색했다. 외진 《작은도서관》에 시집 『따뜻한 흙』이 있었다. 더군다나 도서관은 이전작업 중이었다.

편집증적 강박증일까. 2007년 ‘민음의시’ 시리즈로 재출간된 시인의 첫 시집을 손에 넣었다. 표제가 『사랑의 위력으로』에서,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로 바뀌었다. 시인의 뜻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작은도서관》이 1년여 만에 재개관했다. 『따뜻한 흙』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으로, 부 구분없이 73편이 실렸다.

 

출구를 못 찾고 방안에서 퍼덕이는 새, 등에 큰 혹을 인 육교 옆 귤 파는 팔순 할머니, 앞을 못 보는 열한 살 아이, 분수대 광장에 웅크려 잠든 행려병자, 실종된 아들의 시신을 한강에서 찾아냈다는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는 젊은 여자, 상처 많은 남의 개, 소금수레를 끄는 일흔의 할아버지, 다리를 쭉 뻗고 비를 맞는 사람, 승용차 뒤에 쪼그려 앉은 사람, 춥고 바람 찬 거리의 고양이, 전철에서 침 흘리며 자는 사내, 커다란 약 봉투를 든 병원 앞 남루한 여자, 짚단을 깔고 베고 잠든 농부, 어린 동생의 부축으로 밖에 나온 아이, 눈도 못 뜬 덜 마른 탯줄의 새끼고양이, 등 굽은 아버지, 공원 수돗가에서 벌거벗고 몸 씻는 남자, 골목 밖 부려진 이삿짐.

 

문학평론가 김진수는 해설 「‘몸살’ 혹은 바로크적 욕망」에서 “(시집의) 존재론적 배경이 되고 있는 무덤 속 두터운 어둠은 마모되고 소멸되어가는 삶의 우연성과 덧없음으로부터 연유하는 존재들의 고통스러운 상처의 기억들로 축조”(109쪽)되었음을 말했다. 마지막은 사랑의 지난함과 슬픔을 노래한 「담쟁이 (29쪽)의 전문이다.

 

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 나를 가두었던 것들을 저 안쪽에 두고 // 내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겠다 / 지금도 먼 데서 오는 바람에 / 내몸은 뒤집히고, 밤은 무섭고, 달빛은 / 面刀처럼 나를 긁는다 // 나는 안다 / 나를 여기로 이끈 생각은 먼 곳을 보게 하고 / 어떤 생각은 몸을 굳게 하거나 / 뒷걸음질치게 한다 // 아, 겹겹의 내 흔적을 깔고 떨고 있는 / 여기까지는 수없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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