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사라진 손바닥
지은이 : 나희덕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현대시 강의 『한 접시의 시』(창비, 2012) / 예술 산문 『예술의 주름들』(마음산책, 2021) /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
그동안 내 손에 들린 시인의 책들이다. 나는 3주 간격으로 뭍에 나가면서 군립도서관에 발걸음을 했다. 일곱․여덟 권의 책을 대여하면서 한두 권의 시집을 포함시켰다. 신생도서관 《지혜의숲》의 시집코너 앞에 섰다. 『사라진 손바닥』이 불현듯 눈앞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낯이 익었을까. 그렇다. 평화학․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정희진 글쓰기〉시리즈 다섯 권에서, 어느 책에 실린 에세이 「잠실 밖으로 던져진 누에」였다.
蠶室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파리다 / 문을 단단히 닫으라던 어른들의 잔소리도 / 행여 파리가 들어갈까 싶어서였다 // 누에들이 뽕잎을 파도처럼 / 솨아솨아 베어 먹고 잠이 든 사이 / 파리가 등에 앉았다 날아가면 / 그 자리에 검은 점이 찍히고, / 점이 점점 퍼져 몸이 썩기 시작한 누에는 / 잠실 밖으로 던져지고 마는 것이다
시집 『사라진 손바닥』에 실린 「검은 점이 있는 누에」(96-97쪽)의 1․2연을 인용했다. 2016. 8. 여성학자는 시인과 함께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개인유품과 책상이 정리되는 안산시 단원고에 있었다. 시인은 「난파된 교실」을 낭송했고, 여성학자는 2004년에 출간된 시집에 실린 詩에서 ‘어른의 잘못으로 나비가 되지 못한 애벌레’를 떠올렸다.
시집은 「성북동 비둘기」의 이산怡山 김광섭(金珖燮, 1905-77)의 문학적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9년 제정된 〈이산 문학상〉 제17회 수상작이었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55편이 실렸다. 문학평론가 김진수는 해설 「직조물로서의 시학」에서 “시인의 시세계의 장점은 구체적인 감각적 이미지의 현실성에 기초한 간명하고도 절제된 언어 형식”(104쪽)에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은 전남 무안 회산 백련지를 소재로 한 첫 시․표제시 「사라진 손바닥」(11쪽)의 전문이다.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 말 건네려 해도 /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