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조기에 관한 명상
지은이 : 주강현
펴낸곳 : 한겨레신문사
마을로 간 미륵 1․2(대원정사, 1995) /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2(한겨레신문사, 1996) / 한국의 두레1․2(집문당, 1997) /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해냄, 1997) / 풀어낸 비밀 속의 우리문화2(해냄, 1997) / 조기에 관한 명상(한겨레신문사, 1998) / 21세기 우리문화(한겨레신문사, 1999) /왼손과 오른손(시공사, 2002) /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중앙M&B, 2002)
내방 책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민속학자 주강현(1955- )의 책들이다.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를 잡고 민속학자의 글에 빨려 들어갔다. 나의 편집증적 강박증도 한몫했을 것이다. 독서이력에서 90년대 중․후반 가장 즐겨 찾았던 저자 중 한 명이었다. 출간된 지 30여 년을 바라보는 책의 먼지를 털어냈다.
서울 대학가의 대형서적인지 강화도의 유일서점인지 기억이 흐릿하다. 어쨌든 책이 건네지는 과정만 기억이 오롯했다. 젊은 여직원 둘이 킥킥거렸다. 하물며 그네들은 바닷고기 진짜 조기를 보았을까. 그에 관한 ‘명상’이라니. 표제가 어이없게 들렸을 지도 모르겠다. 민속학자는 서장 「황금투구를 쓴 조기를 기다리며」에서 “변방의 문화는 가장 전형적인 민중문화로, 우리의 잃어버린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원형질에 가까운 보고”(29쪽)라고 했다. 책은 6부 20장으로 구성되었다.
조기떼는 황해와 동지나해 경계해역까지 발달한 양쯔강 하구의 대양자사퇴(大洋子砂堆, 양쯔강 하구로부터 약 300킬로미터 해역의 수심 30미터 모래밭)에서 겨울을 났다. 조기어군은 수천마리씩 제주도 남서쪽에서 북상하여 평안도 앞바다 발해만까지 항해를 거듭했다. 3월초순 조기떼는 홍도 바깥바다를 통과하여 북상하다 안마도 방향으로 접어들어 칠산 바다에서 파시를 이루었다. 안마도 근해는 수심 10-20미터 안팎으로, 조기떼가 북상하기에 어렵지 않은 물줄기이다.
곡우가 되면 한 시부터 열세시까지 어김없이 조기떼의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부들은 구멍이 뚫린 대나무통(竹筒)을 바닷물에 집어넣고 한쪽 귀를 막고서 조기울음을 들었다. 조기는 1천마리가 한 동이며, 1950년대를 기준으로 조기 한 동은 쌀 세가마니 값이었다. 배 한 척이 하루에 많이 잡으면 열 동, 즉 1만마리까지 잡았다. 칠산으로 몰려든 조깃배들은 대략 70여일 동안 조기를 잡았다.
황해 중심부로 이동하던 조기떼의 일부는 고군산도로 들어가고 일부는 격렬비열도로 북상하면서 넓은 어장을 형성했다. ‘독살’은 돌로 만든 어살로, 강이나 바다의 만을 돌로 막아서 물고기를 잡는, 선사시대로 소급되는 가장 오래된 전통어법이다. ‘주목’은 나무말짱을 세우고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던 기구로 어살이 발전한 정치성 어망의 한 가지 형태이다. 비명횡사한 장군들이 공통적으로 당대의 민중들에 의해 신격화되는 이유는 곧 민중의 한풀이가 신의 현현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북상한 조기 선발대는 음력 3월 하순에 연평도에 당도하였으며 후발대도 4월 초파일 무렵에는 모두 연평도에 도착했다. 연평도에서는 4월 초파일을 ‘조기의 생일’이라고 불렀다. 연평도 조기는 칠산 조기보다 더 컸다. 올라오면서 살이 올랐다. 6월말 경 조기떼는 최종목적지 평안도 앞바다 철산 대화도어장에 도착했다. 철산어장의 중심은 가도였다. 장장 1,000킬로미터가 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알을 낳고 홀쭉해진 조기들은 바다골짜기의 깊은 물길 60-80미터의 지름길을 택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조기의 3대 어장은 칠산어장(3-4월), 연평도어장(5-6월), 대화도어장(6-7월)이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물에 들던 그 많던 조기가 사라졌다. 계화도, 천수만, 영산강, 금강 일대의 간척으로 갯벌이 사라져버리면서 물길이 막혔다. 지금은 가거도, 추자도 심지어는 동중국해의 월동하는 조기를 잡았다.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알이 밴 조기가 밥상에 올라왔다. 조기들은 더 자라지도 못하고 종족보존을 위해 산란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다. 민속학자는 탄식했다. “옛 조기잡이가 인간에게 허용되었던 낮은 단계의 생산력이야말로 훨씬 과학적”(283쪽)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