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대빈창 2024. 8. 20. 07:00

 

책이름 :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지은이 : 고형렬

펴낸곳 : 창비

 

침대에서 어둠과 빛으로 뒤척인 우울의 날 / 붉은 장미가 몸을 뒤집고 한 권의 책으로 태어났다 / 요재지이의 흰 비둘기가 푸드덕 날개를 펼쳤다 / 빨간 향기의 장미가 책으로 변신한다 / 얼마나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자신의 변신인가 / 이 책은 다시는 장미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이 작은 책의 글을 돌 속에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 나는 이제 이 언덕에서 다른 꿈을 꾸지 않는다 / 어젯밤 어떻게 장미가 책이 됐는지 통 알 수 없어 / 무엇으로 그것들이 내게 다시 돌아왔는지 / 어느날 반투명의 책이 되는 몇송이 장미들이 /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갑자기 찾아왔던 것 / 낙망 속에 기다림도 없는 빛과 어둠 속에서

 

시집을 여는 첫 시 「장미가 책이」(8쪽)의 전문이다. 고故 윤중호 시인의 민중시 경향은 ‘창비시선’과 어울렸는데 대부분의 시집은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첫 시부터 나는 고개을 갸웃거렸다. 시편은 ‘문학과지성 시인선’과 어울렸는데 〈창비 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오랜 시간 창비 편집부에서 글을 만졌다.

내가 그동안 잡은 시인의 책은 놀라운 생태에세이 『은빛 물고기』(바다출판사, 2003)와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창작과비평사, 2001) 뿐이었다.  처음 잡았던 시인의 시집은 사실주의 시편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시인 고형렬(高炯烈은, 1954- )은 1979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력 30년을 넘기면서 4년 만에 내놓은 일곱 번째 시집으로 2010. 5.에 초판이 나왔다. 1980년대 리얼리즘 문학의 한 줄기였던 시인이, 등단 초기의 시 세계로 돌아온 시집이라고 했다.

표제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시가 불완전한 것은 시를 담아내는 언어가 그러하기 때문으로 시인의 고뇌를 드러낸 시였다. 문학평론가 김종훈은 해설 「시간의 골상학」에서 “그는 시간이 착종되고 문장이 뒤틀리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문장 속에 갇힌 자신을 환기하며 시 쓰는 현재를 드러낸다”(133쪽)고 평했다. 시편에는 푸른미선나무, 달개비, 형광물고기, 가재, 자생란, 옥수수수염귀뚜라미 같은 사라지거나 소외된 생물들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드러났다. 문학평론가 전승희는 표사에서 “찬란한 득도의 경지에 오른 한 시인이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세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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