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무기질 청년

대빈창 2024. 9. 23. 07:00

 

책이름 : 무기질 청년

지은이 : 김원우

펴낸곳 : 책세상

 

『무기질 청년』(민음사, 1981)은 소설가 김원우(金源祐, 1947- )의 첫 창작집이었다. 작가는 1977년 중편소설 「임지任地」가 『한국문학』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내가 잡은 책은 도서출판 《책세상》이 1970-80년대초에 출간되었던 첫 작품집을 복원 출간한 ‘소설 르네상스’ 시리즈였다. 「피난살이」의 공간적 배경, ‘마당 깊은 집’을 표제로 삼은 장편소설의 작가 김원일의 친동생이었다. 내 머리속에 ‘무기질 청년’이라는 단어가 들어온 지 무려 3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서 책을 펴들었다. 소설집은 중편소설(표제작) 1편과 단편소설 11편으로 구성되었다.

어머니․형수․아내는 기독교신자, 신산한 삶을 살아오신 제사를 챙기는 할머니가 계시는 집안의 나는 무신론자, 일 년 전에 요절한 사변둥이 막내의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새벽 가족 일행은 교회의 새벽기도에서 추도예배를 지내는 「추도追悼」. 영화 필름 판권을 사서 지방 영화관을 순회하는 흥행업자 서사장의 일꾼으로 권씨와 이양과 입장권 조작으로 탈세를 모의하는 군대를 마치고 복학을 기다리는 나 「하루살이」. 퇴근하고 일주일에 3회 부잣집 영어 과외를 하는 불어선생으로 언덕바지 여덟평 시민아파트에 사는 나는 성미․십일조․약혼반지를 교회건립기금으로 바친 아내와 말다툼하다 손찌검까지 가는 「고간股間」.

나는 병원과 약국 문턱과는 담을 쌓고 사는 건강한 임신부로, 첫째아이 해산 후 넉달 만에 애가 들어서 시할머니 몰래 낙태를 해서 냉대와 모멸을 감수하며 세 번째 배태한 둘째가 순산하기를 바라는 「태반胎盤」. 사립학교 정교사 나는 임시직 교사의 남편 될 사람과 결혼이 지지부진한 상태로, 그의 양모와 생모에게 성당미사 참석을 권유했고, 봄볕아래 그들이 나타나는 「봄볕」. 문선공 출신 아버지가 납독과 위장병으로 죽자, 직업을 대물림한 나는 장사를 치르고 공원들과 함께 철공소․인쇄소 밀집 골목 선술집에서 술자리를 갖는 「부정父情 또는 적의敵意」.

‘문화가 숨어버린 시대 장식품에 불과’한 시인으로 시를 쓰지 못하는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내와 고국으로 돌아와 혼자 재출국하는 화가 허형을 만나면서 「죽어가는 시인詩人」. 직장에 사표를 내고 친구들과 광고대행회사를 꾸리고 이용대상으로 고향친구를 끌어들였으나 그만 좋은 일 시키고 창업멤버 셋은 모두 떨어져나가는 「헛일」. 일본 유학생 외삼촌은 빨갱이로 구속되어 외가의 재산을 모두 들어먹고 감옥에서 풀려나 동란이 터지자 월북하고 외숙모는 친정 부산으로 떠나, 어려운 시절 대학을 마치게 해준 외할머니와 산동네 단칸셋방에서 사는 나 「집과 이내와 송곳니」.

4학년 소년 시선으로 바라본 사랑채․행랑채의 셋방 월세 다섯 가구를 들인 적산가옥 ‘마당 깊은 집’의 피난살이 시절을 그린 「피난살이」. 초기 폐결핵 진단을 받은 그는 단칸 가겟터 방을 운좋게 얻어 매일 고층 아파트에 사는 소심증 환자 허선생과 관불사觀佛寺 새벽 산행에 나서는 「해우교解憂橋」. 무역회사 기획실에 근무하는 나, 술집에서 누런봉투가 우연히 딸려왔다. 대학원생 이만집의 ‘내 젊은 날의 비망록’이라는 제목을 붙인 대학노트 세 권짜리 일기였다. 거의 두달 만에 우연히 같은 술집에서 이만집을 만났으나, 일기를 찢어버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나는 무기질이다. 물이나 공기를 무기질이라고 한다.······. 어떤 악과 선도 이해는 한다. 공존공영을 위해서. 나는 무기질이므로 존재가치가 있다.” (308-309쪽)「무기질 청년」.

책은  2007년 6월 출범한  ‘소설 르네상스’가  1차분으로 펴낸 12권 중의 한 권이었다. 그 시절 한국문학의 위기와 종언에 관한 담론이 문학계의 화두였다. 물론 지금은 화두는커녕 입에도 오르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지만. 시리즈는 절판된 책들을 젊은 평론가의 해설과 함께 복간했다. 『무기질 청년』의 해설은 두 개였다. 故 문학평론가 김현(金炫, 1942-1990)의 「세속적 트임의 의미」(1981), 문학평론가 김형중(1968- )의 「어느 꼬장꼬장한 사실주의자에 대한 단상」(2007). “작가들에게 첫 작품집은 젊은 문학적 감수성과 열정이 충만하게 내장돼 있으며 앞으로 전개해나갈 작품 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압축하고 있는 문학의 원형”이라고 ‘소설 르네상스’ 편집위원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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