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오늘의 착각
지은이 : 허수경
펴낸곳 : 난다
『오늘의 착각』은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의 유고 산문이었다. 문학계간지 『발견』에 2014-2016년까지 2년 동안 8회에 걸쳐 연재된 글들을 모았다. 생전 시인의 요청으로 머리말 대신 ‘연재를 시작하며’가 실렸다. ‘어떤 상황을 착각으로 살아내는 미학적인 아픔의 순간이 시에는 있을 뿐이다.’(5쪽) 여덟 편의 에세이는 시인의 손에 들린 시편과 책들, 뉴스가 알려 준 소식, 듣게 된 음악, 만난 사람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원체험 자연 속에서 만난 ‘착각’에 대한 이야기였다.
1. 물고기 모빌, 혹은 화어花魚. 침실 전등아래 나무로 만든 여러 빛깔의 물고기 모빌은 필리핀을 여행한 친구가 선물한 현지 목공예품. 독일 공동묘지는 마을 안에 자리 잡았다. 축구장 칠십 개 크기의 마닐라 공동묘지의 무덤 사이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가을빛 아래 물고기가 빨랫줄에서 말라가던 외가 마을. 화어는 참새우, 달강어, 북어, 학꽁치, 붉은메기 등을 말려 꼬리를 노란빛과 붉은빛으로 물들인 음식. 필리핀에서 온 물고기 모빌이 고향의 화어로 헤엄친다.
2. 김행숙과 하이네의 착각, 혹은 다람쥐의 착각. 김행숙의 시 「유리창에의 매혹」은 착각 속에 모든 감각을 놓아버리고 싶은 시인의 깊은 열망. 작은 마을에 살 때 마당을 오가던 다람쥐가 투명 유리문을 앞발로 두드리는. 아도르노가 하이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쓴 에세이 「하이네라는 상처」에 인용된 시 「귀향」. 하이네를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한 아도르노의 착각.
3. 미스터 크로우와 오디세이의 착각. 여름 중동지방의 발굴을 하는동안 불면은 하얀빛, 독일에서의 불면은 검은빛. 불면의 겨울밤에 읽은 강정의 「미스터 크로우」. 착각들이 만들어내는 역질서들의 이미지들이 처연하고 낭자.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은 믿음이 가져온 착각.
4.오래된 푸른 줄의 원고지, 혹은 딸기 넝쿨에 대한 착각. 정통성 없는 제사를 지낸 서자인 아버지. 극작가 아버지 유물을 챙기다가 바래진 푸른 줄의 원고지. 극본에 쓰인 그 문장은 아버지의 진정이었을까? 아니면 작가와 작품에는 정말 거리가 있는가?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던 계절의 열매를 밭딸기라고 했다. 독일로 와서 마당에 딸기를 심었을 때 딸기 넝쿨에서 오래된 원고지의 푸른 줄을 떠올렸다.
5. 장소도 떠날 수 있다. 꿈에서 폐허도시의 요란한 폭발음. 이슬람국가(IS)가 파괴한 아시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고대도시 니므루드 유적지. 십여년 만에 찾은 고향, 더 늙고 자기연민이 더 많아진 한 여자를 내 고향이라는 장소도 뜨악하게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꿈에 나타난 폐허도시는 이 지상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닌 내 꿈에서만 존재하는 장소.
6. 독일, 2015년 가을의 단어들. 이현승의 시 「고도를 기다리며」의 이민․망명. 전쟁말고는 겪은 것이 없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서 태어난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는 난민선에 올랐다가 온 가족과 함께 배가 뒤집혀 모두 죽었다. 몸은 터키 해변 보드룸으로 떠밀려왔다. 비공식집계로 백오십만명의 난민이 올해 독일로 들어온다고 했다. 떠나온 곳에서 전쟁이 지속되는 한 그들은 떠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7. 착각의 저 너머. 임승유의 시 「여인숙」. 신경의 기원은 식물과 동물이 같다. 식물에게서 존재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은 어쩌면 유전자에 각인된 고생대의 기억 때문. 이웃 B씨는 파킨슨병을 앓고, 부인은 치매요양원으로 떠났다. 헛것을 보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파민을 복용하는 파킨슨 환자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부작용. 논리로 설명되는 세계의 불완전함을 절망하는 것이 시.
8. 잘츠부르크는 어디에 있는가. 잘츠부르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시인 크라클의 「밤에Nachts」. 시 안에 더 없이 널려있는 색들은 시각이 우리의 존재를 얼마나 간섭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십년 전 보았던 〈사운드 오브 뮤직〉을 DVD로 보며, 배경이 잘츠부르크라는 것을 새로 알았다. ‘회상은 인간을 놓아주지 않는다. 인간의 몸이 자신의 회상을 언젠가는 떠날 뿐이다.’(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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