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뿔
지은이 : 신경림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農舞」의 도입부다. 나에게 시인 신경림(申庚林, 1935-2024) 선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였다. 첫 시집은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었다. 시인의 수상소감은 “혼자만이 아는 관념의 유희, 그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시에 대한 반발로 더욱 대중의 언어로 대중의 생각을 끄는 것이 내가 주로 생각하고 있는 시”라고 밝혔다.
시집은 한국 시단과 독서계에 일대 충격을 던져주었다. 농민들의 삶의 애환을 그린 시들은 민중문학 전진의 팡파레였다. 1970년대 선생의 서정적 현실주의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미학적 탐색으로 한국 시문학사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표사에서 시인 정희성은 말했다. “우리는 어느덧 그의 아픔과 슬픔과 쓸쓸함까지도 아름다움으로 느끼고 사랑해오지 않았던가” 시집은 인간 내면과 죽음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표지그림은 이종상의 〈源形象―自然으로〉 1997. 이었다.
1부 13편은 ‘떠도는 자의 노래’였고, 2부 9편ㆍ3부 10편은 사회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들, 4부 13편은 가족사 시편들, 5부 10편은 보고타, 호치민, 하노이, 丹東, 圖們, 集安, 長白, 압록강 등 여행시편이었다. 시집 말미에 해설ㆍ발문대신 시인의 산문 「시인이란 무엇인가」를 실었다. “시는 어차피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이다. 억지로 만드는데서 벗어나 좀더 자연스러워지면서, 잃어버린 절규성을 회복하고, 왜소해짐으로써 놓친 큰 울림을 되찾는 일”(95쪽)이다.
시인은 『뿔』에서도 여전히 사회적 약자와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연작시로 「乞人行」 3편, 「小女行」 2편, 부제가 ‘江邑記’ 4편이 실렸다. 마지막은 표제시 「뿔」(38쪽)의 1ㆍ2연이다. 나는 여기서 소를 당연히 계급의식 없는 즉자적 상태의 민중으로 읽었다.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번도 쓴 일이 없다 /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 그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 쟁기를 끌면서도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 이려 하면 가고 워워 하면 서면 된다 / 콩깍지 여물에 배가 부르면 / 큰 눈을 꿈벅이며 식식 새김질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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