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관계에 부딪힐 때마다 혼자 찾아가 바다를 보며 마음을 다독이던 곳이었다. 강화도 해안을 빙 둘러싼 53개의 돈대墩臺에서 가장 접근성이 용이했다. 삼암三岩 돈대는 외포 항에서 황청포구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999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삼암 돈대는 미루지 돈대와 함께 원형原形에 가장 가까운 돈대라고 한다.
돈대에 고인 물을 빼는 배수장치 석누조石漏槽가 석벽에 따로 설치되었다. 여자도 쉽게 담을 넘을 수 있다는 뜻의, 낮게 쌓은 담장 여장女牆도 부분적으로 살아있었다. 석축 상판의 무리지은 개망초가 며칠 동안 퍼부은 빗줄기로 낯이 말갛게 씻겨있었다. 지난주 하루밤새 300mm의 폭우가 쏟아져 돈대 바닥 한 구석이 꺼졌다. 러버콘rubber cone이라 불리는 주황 고깔모자 도로시설물이 돈대 안에 들어와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돈대 주변의 나무가 크게 자라 전망을 가렸다. 좁은 해협너머 선명한 마루금의 산줄기는 석모도 해명산이었다. 석모도는 어머니의 고향이다. 어머니는 스물세 살에 다섯 살짜리와 태어난 지 열흘이 지난 둘째 사내애를 안고 김포로 이사 오셨다.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회상하셨다. 큰 형은 등에 업힌 작은형이 부러웠을 것이다. 다섯 살짜리는 다리가 아파 칭얼거리며 등에 업힌 동생을 남에게 주고 가자고 엄마에게 졸랐다.
나는 외할아버지와 친외할머니를 뵙지 못했다. 두 분은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나셨다. 한때 큰 배의 선주이셨던 외할아버지는 가산이 기울자 입 하나 줄이자고 큰 딸을 섬 안의 농사꾼에게 시집보냈다. 그때 어머니는 방년 18세였다. 김포 언덕배기 초가집에 살 때, 어머니를 찾은 외할머니는 계모였다. 외할머니의 눈가에 시퍼런 독기가 출렁였다. 어머니는 계모를 두려워하셨다. 외할머니는 말끝마다 어머니를 다그치셨다. 어린 내 눈에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어머니가 불쌍해보였다. 어미를 따라온 배다른 동생들은 어머니를 머슴 부리듯 했다.
“막내에게 폐만 끼치는구나. 어서 죽어야 할 텐데”
파킨슨 병증의 하나가 단기치매였다. 어머니는 방금하셨던 말씀을 자꾸 되뇌었다. 하지만 당신의 말씀은 진심이었다. 어머니의 내리사랑은 아주 특별하셨다. 나의 죽마고우들은 하나같이 어머니의 막내 편애를 부러워했다. 나는 고교시절에 형제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어머니는 내가 모시겠다고. 올해 아흔 둘이신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차려주는 세 끼 식사를 맛나게 드셨다. 그리고 아침식전, 아침ㆍ점심ㆍ저녁 식사 후, 잠들기 전 하루 다섯 번 빠짐없이 복용약을 챙기는 막내의 정성을 고마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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