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되어있는 좁고 긴 논'을 다랑논이라고 합니다. 다랑논의 지역 사투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다랭이, 다랑치, 다랭이 논, 삿갓배미, 다락배미, 다락 논... 등등.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에서는 '다랑구지'라 부릅니다. 제가 사전적 의미의 진짜 다랑구지를 본 것은 15여년전 지리산 자락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던 중 피아골의 연곡사를 찾아가던 길 이었습니다. 그때 교통이 불편한 산골 마을에서 편의를 봐준 당치마을 이정운 이장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장님은 두 가지 얘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하나는 피아골의 단풍이 유난히 붉은 것은 빨치산의 피가 배어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피아골 삿갓배미의 유래 입니다. '옛날 한 농부가 김매기를 하다 쉬던 중 자기 논의 필지를 아무리 세어봐도 하나가 모자랐습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일어서며 옆의 삿갓을 짚어드니 그 밑에 논 한배미가 숨어 있었습니다.' 주문도의 다랑구지는 산골짜기를 개간한 것이 아니라, 제방을 쌓아 바다를 막아 만든 간척지입니다. 제방 너머로 아차도와 볼음도가 보입니다. 제가 알기로 강화도 유일의 비경지정리 들판 입니다. 대빈창 해변 가는 길에 자리잡아, 더위를 피해 섬을 찾은 도회인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그 유명한 남해 섬의 가천마늘 다랭이 논은 2005년에 문화재청이 '명승 15호'로 지정할 정도로 희소가치를 자랑합니다. 농부라면 누구나 경지정리가 되어 대형 농기계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논을 원합니다. 주문도 다랑구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경지정리에 따른 감보율의 발생 때문입니다. 경지정리를 하자면 농로나 수로를 넓고 반듯하게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땅주인들은 비율대로 땅을 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군에서 아무리 종용해도 고집 센 섬 노인 몇 분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여적 다랑구지가 살아 있는 것 입니다. 올 모내기도 볍씨소독, 싹 틔우기, 못자리 설치 등은 최신식 농법으로 일사천리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모판을 다랑구지 논마다 이송할려면 어쩔 수없이 지게질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대빈창 들녘은 물이 풍부합니다. 저수지 없이 순전히 관정(지하수)으로 농업용수를 대도 물이 마르지않는 천혜의 자연조건이 바둑판식 경지정리 사업을 막을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대빈창 다랑구지의 운명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애기 울음소리가 끊어진 섬 마을의 농사는 누가 짖겠습니까. 다랑구지는 묵정논이 될 것이고, 그중 마을과 가까운 논은 노인들 손으로 채마밭으로 일구어지겠으나 대부분은 풀과 잡목으로 뒤덥힐 것 입니다. 이름없는 민초들의 피와 땀이 배인 다랑구지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느 농촌이나 매한가지로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난 섬마을 입니다. 기업과 금용이 도산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틀어 막습니다. 하지만 농작물이 흉년이면 외국에서 즉시 수입해 가격 상승을 기어코 막습니다. 공정사회(?)에서는 모두 싼 농산물을 먹을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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