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지은이 : 신경림
그린이 : 송영방
펴낸곳 : 문학의문학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민중시인 신경림(申庚林, 1935-2024)의 에세이다. 1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 12편은 일제강점 말기와 해방정국의 어린 시인의 자화상이었다. 2부 ‘삶의 뒤안길에서’ 18편은 6ㆍ70년대 어려웠던 시절, 이 땅 글쟁이들의 기행, 헤프닝, 애환이 빚은 문단 풍속도와 시국사건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뒷얘기들이었다. 동양화가 송영방(宋榮邦, 1936~2021)의 그림 24점이 실려 읽는이의 눈길을 밝게 했다.
1부, 나를 비롯한 우리반 아이들 몇몇이 우리말을 쓰다가 교장한테 걸려 입에 분필을 잔뜩 문 채 복도에 꿇어앉아 벌을 섰다. 해방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제일 먼저 집을 부수고 가재도구를 꺼내 불을 지르고 몰매를 때린 것이 조선인 순사 와지마였다. 철저한 친일주의자 교장은 해방정국에서 국수주의자로 변신, 미군정때 좌익 교사를 몰아내고 도 학부국장, 문교부 차관, 마침내 국회의원이 되었다.
삼촌의 용돈으로 장날 책전에서 내 손으로 처음 샀던 책은 현덕의 동화집 『포도와 구슬』이었다. 잡화점집 동무와 문제집과 참고서를 사러 토요일 읍내 오십리 길을 떠났고, 서점에 도착하자 어둠이 깔려 군청직원 아저씨의 도움으로 군청 숙직실에서 자고 아침밥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술이 취해 주무시면서 웃옷을 아무데나 벗어놓았는데, 호주머니의 지전을 훔쳐 군것질 용돈은 늘 넉넉했다.
서울에 외가가 있어 5학년 때 진외당숙의 안내로 서울 구경을 5일간 했는데 담임도 서울 구경 한일이 없던 시절이었다. 도청소재지 청주에서 초등학교 문예작품 전시회가 열렸는데, 담임은 당선자로 어린 시인을 의심치않았으나, 조회에서 교장이 호명한 당선자는 산문부분 아이였다. 제헌의회 당선자는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체가 통합한 청년단의 단장이었다.
2부, 등단은 했지만 10년 동안 시를 쓰지도 않고 발표도 안하던 시절, 고향 읍내에서 시인 김관식을 만났고, 옷가지 몇 벌ㆍ취사도구만을 챙겨 아내를 데리고 그의 방 한 칸을 빌려 서울생활 시작. 서울서 맞은 첫 설, 먼저 조지훈 시인 댁으로 세배를 가고, 술이 엉망으로 취해 동서지간 형이었던 미당 댁을 방문한 김관식 시인. 김관식 시인 집에서 하룻밤 술을 마시고 아침밥까지 얻어먹고 나오면서 동대문 고서점으로 직행, 술 먹으려고 서재에서 값비싼 책을 봉투에 넣어 나왔으나, 안에는 낡은 원고뭉치가 들어있었던 천상병 시인.
육군 소령으로 복무하다 글쟁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가 귀대일자를 어겼고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제대한 백시걸 시인. 집을 한 번 나오면 보름씩, 한 달씩 들어가지 않고 명동을 맴돌았던 이현우 시인. 동백림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당해 정신까지 오락가락했고 생식불능이 된 천상병 시인. 아내와 헤어지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남의 눈치보지 않고 사는 길을 궁리 끝에 길거리에서 기타 치며 약을 팔던 임종국 시인.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즐거움이었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없는 자리에서 남의 얘기를 절대로 하지 않는 미덕의 황명걸 시인. 주머니에 원고료 몇 푼 들어오면 친구를 찾아가 밥이나 술을 샀던 구자운 시인. 『문장文章』지의 선두주자로 등단하고, 겨우 스물한 편의 시를 남긴 이한직 시인. 추석며칠 전, 한 보따리의 아이들 내의와 양말을 택시 안에 던져 넣었던 겉모습과 다른 세심한 시인 조태일. 단양 농장에서 전국에서 찾아 온 가난한 이들에게 공짜로 침을 놓아주고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웠던 신동문 시인.
바둑을 잘 두었고 놀기를 좋아하고 술을 잘 마셨으며 일을 잘했고 사리가 분명했던 작가 강홍규. 아직 『임쩍정』이 금서였을 때 충북 괴산 벽초의 선영에 성묘를 하고 낫을 빌려 벌초까지 했던 작가 이문구. 자신이 근무하던 『월간문학』의 이름을 빌려 주어, 첫 시집 『농무農舞』가 세상의 빛을 보게 한 작가 이문구. “좋은 사람한테 술 사는 일처럼 즐거운 일이 없다는 걸 모른다면 세상을 헛 산 걸”이라는 동화작가 손춘익. 작품을 놓고 혹평과 호평을 하던 문학주의자 작가 한남철. 마지막은 첫 시집 『농무農舞』에 실린 「파장罷場」의 전문이다. 시인의 에세이 표제는 시의 1행行이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45) | 2024.12.18 |
---|---|
빈산엔 노랑꽃 (47) | 2024.12.17 |
허난설헌許蘭雪軒 시집詩集 (48) | 2024.12.13 |
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48) | 2024.12.12 |
시간의 기원 (48) | 2024.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