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허난설헌許蘭雪軒 시집詩集

대빈창 2024. 12. 13. 07:30

 

책이름 : 허난설헌 시집

옮긴이 : 허경진

펴낸곳 : 평민사

 

『허난설헌許蘭雪軒 시집詩集』은 연민학회淵民學會 편집위원장 허경진의 〈韓國의 漢詩〉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잡은 책이었다. 시리즈 열한 번째 『석주 권필 시선』을 먼저 잡았다. 군립도서관에 비치된 유일한 시리즈였다. 내가 잡은 책은 개정ㆍ증보판으로 시詩 201수, 부賦 1편, 산문 2편이 실렸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시인은 스스로 난설헌蘭雪軒이라 아호를 지었다. 본명은 초희楚姬였다. 허난설헌(1563-1589) 집안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으뜸가는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초당 허엽(1517-1580), 삼남삼녀 중 셋째 딸이었다. 큰 오빠는 약록 허성(1548-1612), 작은 오빠는 하곡 허봉(1551-1558), 아우는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1618)이었다. 어머니는 후처였다. 같은 어머니 형제는 하곡, 난설헌, 교산이었다.

아버지 초당은 시대적 한계로 딸에게 글을 가르쳐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허난설헌은 오빠들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그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열세살 위의 오빠 하곡은 친구면서 당대 최고의 시인 손곡 이달에게 부탁해 누이를 가르쳤다. 그의 뛰어난 재질은 남매 가운데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초당에 쌓여있던 만 권의 책은 난설헌 시의 제재가 되었다.

허난설헌의 불운은 열네 살에 김성립에게 시집가면서 시작되었다. 남존여비의 유교사회에서 뛰어난 여성 천재는 혼자 시들어갔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오직 정을 붙이고 살던 어린 오누이도 세상을 떠났다. 뱃속 아이마저 잃었다. 1589년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평생지었던 시들을 불태워버렸다. 기억력이 뛰어난 아우 교산이 외웠던 시들과 친정에 남아있던 시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은 것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전해졌다. 『광한전廣寒殿 백옥루白玉樓 상량문上樑文』은 무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지은 부賦로 신동이라고 이름을 날렸다. 마지막은 「아들 죽음에 곡하다哭子」(20-21쪽)의 전문이다.

 

去年喪愛女,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今年喪愛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雙墳相對起,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蕭蕭白楊風,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鬼火明松楸,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紙錢招汝魄,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應知弟兄魂.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夜夜相追遊,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 테지.

縱有腹中孩,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冀長成,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浪吟黃臺詞,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血泣悲呑聲,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키네.

 

p.s 경기 광주 초월읍의 안동김씨 종중 묘역에는 어려서 죽은 오누이 무덤을 앞에 두고 허난설헌의 묘와 시비가 서있다. 중부고속도를 타고 남도로 향할 때 묘소에 들러야겠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 너무 일찍 스러진 한 많은 여인의 무덤에 술 한 잔 따라드리는 것이 도리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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