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망양돈대에서 바다를 보다.

대빈창 2024. 10. 15. 07:00

 

강화도에서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가 젓갈시장이 자리 잡은 내가면 외포항外浦港이다. 석모대교가 놓이기 전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보문사를 가려면 외포항에서 카페리호를 타야했다. 이날이태까지 나의 발길이 무수히 닿은 곳으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돈대를 등한시했었다. 외포항은 강화도에서 횟집과 모텔들이 밀집한 포구였다. 돈대를 가려면 바다를 가로막아선 횟집들 골목을 이리저리 뚫고 가야했다.

바다를 향해 돌출한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에 등을 기대고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三別抄軍護國抗爭遺墟碑〉가 서있다. 삼별초가 고려왕조의 몽고 화친을 반대하고 진도로 떠난 곳이 외포항이었다. 잘 알다시피 삼별초 항쟁은 진도와 제주도로 이어졌다. 진돗개와 제주도 돌하르방 모형이 유허비를 지키고 있었다. 유허비를 뒤로하고 가파른 경사의 통나무 계단을 올랐다. 새로 끼워 맞춘 석물이 생경스런 빛을 발했다. 직사각형의 망양望洋 돈대墩臺가 경사진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 바다洋는 커녕 폭 좁은 해협에 바닷물이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바다 건너편은 석모도의 대섬과 돌캐나루였다. 키 큰 바늘잎 나무가 돈대의 전망을 가렸다. 석모도는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어머니는 60년 전 다섯 살 사내아이와 태어난 지 열흘지난 갓난아기를 품고 두 개의 바다를 건너 김포로 이사를 나오셨다. 막내아들을 따라 석모도 보문사가 바다건너 보이는 작은 외딴 섬 주문도에 삶터를 꾸리신지 16년 세월이 흘렀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축 늘어지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나는 비지땀을 흘리며 강화 풍물시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읍내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았지만 별무 소용없었다.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두 번의 MRI 촬영결과 정형외과 진료는 이상이 없었다.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섬에 들어왔다. 우여곡절 끝에 파킨슨병이라는 자가진단을 내리고 신경과를 찾았다. 외래 첫날 뇌 MRI 결과는 뇌동맥류였다. 어머니는 나이가 많으셔서 수술이 불가했다.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도대체 오리무중이었다. 이른 새벽에 첫 배를 타고나와 병원의 진료ㆍ검사를 받고 약을 처방받으면 섬으로 들어가는 막배 시간이 빠듯했다.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모텔에서 하루 묵는다는 것이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젊은 의사가 나를 위로했다.

 

“힘드시겠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한 번만 더 내원하세요.”

 

예약이 잡혀있는 날,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 운 좋게 배가 떴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검사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장비 고장으로 검사가 지체되었고,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앞순번이었던 환자가 우리를 위해 차례를 양보했다. 집이 병원주변이라 괜찮다고, 먼저 검사를 받으시고 배를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고. 다행스럽게 막배를 타고 어머니를 모시고 섬에 들어올 수 있었다.

며칠 뒤 혼자 병원으로 향했다. 결과는 파킨슨병이었다. 증상완화제를 드시기 시작했다. 사흘째부터 어머니는 어렵게나마 보조기구없이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나는 날아다닐 기분이었다. 의사선생이 너무 고마웠다. 시인 친구의 인삼가게에 들러, 작은 선물을 마련했다. 어머니가 이만큼이나마 일상을 영위하시는데, 젊은 의사의 배려가 큰 힘이 되었다. 선생은 큰 수술을 많이 받으신 어머니가 통증을 호소하자 통합관리를 해주었다. 어머니가 번거롭게 다른 진료과에 발걸음을 하지 않으셔도 되었다. 아쉽게도 젊은 의사는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신도시에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나는 진정으로 그분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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