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계룡돈대에서 바다를 보다.

대빈창 2024. 11. 4. 07:30

 

스무날 전 읍내 일을 마치고 화도 선수항 배터로 차를 몰았다. 2항차 오후 1시에 출항하는 삼보6호에 승선할 생각이었다. 시간은 넉넉했다. 영재 이건창 묘소에 들를까. 장곶돈대 언덕배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집을 펼칠까. 그렇다. 계룡鷄龍돈대墩臺가 있었다. 나는 외포항을 향해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외포항에서 고개를 올라 삼암돈대와 석모대교로터리를 지나 고개를 내려서면 황청포구였다. 포구를 지나면 드넓은 망월 벌판이 펼쳐졌다.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길〉 구간이었다.

시골마을 고샅을 빠져나가자 황금들녘에 벼베기가 한창이었다. 일찍 벼를 벤 필지마다 ‘볏짚 원형 곤초 사일리지’가 거대한 공룡알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2호 계룡돈대는 광활한 벌판 끝자락 바닷가의 낮은 구릉에 자리 잡았다. 농로를 타고 돈대에 다가가자 다행스럽게 승용차 두세대를 세울 공터가 나타났다. 계룡돈대는 바닷가 천연 암반위에 앉았다.

강화도 해안을 빙 둘러싼 53개 돈대에서 48개 돈대가 조선 숙종5년(1679년)에 축조되었다. 숙종은 돈대 공사를 두 달 안에 끝내려고 작정했다. 언덕 끄트머리의 장곶돈대나 바닷가 바위절벽의 망양돈대 공사는 쉬운 편이었다. 당시 망월 벌판은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이었을 것이다. 사전정지작업으로 갯벌부터 다져야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 승병과 어영군 1만5천명이 동원된 강화도 돈대공사는 석 달 만에 끝날 수 있었다. 숙종5년에 축조된 돈대 48개에서 명문銘文이 있는 돈대는 계룡돈대가 유일했다. 돈대 출입문 근처 성벽 아래부문의 명문은,

 

康熙一十八年四月日慶尙道軍威御營(강희18년 4월 경상도 군위 어영)

 

강희康熙는 중국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연호였다. 돈대를 오르는 낮은 경사지에 통나무 계단이 놓였다.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나오는 T자형 소나무가 출입문 주위에서 듬성듬성 키를 늘였다. 서리가 내리기 전, 잔디가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돈대의 앉음새가 낯설었다. 그동안 나의 발길이 닿은 돈대들의 출입문은 장축長築에 자리 잡아 전망이 가까웠다. 계룡돈대는 출입문이 단축短築에 있었다.

정면의 바다건너 암산巖山은 석모도의 상주산이었다. 좌측에 석모도에 딸린 무인도 섬돌모루가 보였다. 독재자의 더러운 탐욕이 닿았던 무인도였다. 경호실장이었던 안현태가 전두환의 퇴임 후 거처로 개발했던 곳이다. 개눈에 똥만 보인다고 작은 섬 안에 호텔, 별장, 카지노 시설을 지었다. 섬의 해안선 전체를 석축을 쌓아 군사 요새처럼 만들었다. 돈대의 이름 계룡鷄龍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지금까지 나의 발길이 닿았던 여섯 곳의 돈대 모두에서 어머니의 고향 석모도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지 1년이 지났다. 당신의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불안해졌다. 병증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치료제가 아닌 증상완화제의 한계였다. 점점 몸놀림이 힘들어지자 당신은 지독한 변비에 시달렸다. 세 번째 D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두 번이나 관장을 하고서 저녁배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휠체어에 의지한 오랜만의 외출이었지만 고단한 당신은 곤하게 잠드셨다. 두어 달 전부터 불면에 시달리신 어머니는 자정이 지나서야 어렵게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오늘도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다짐할 것이다. “지치지 말자.”

'대빈창을 아시는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미식당의 생선구이  (40) 2024.12.09
건평돈대에서 바다를 보다.  (37) 2024.12.02
온실 찾은 야생초  (9) 2024.11.01
망양돈대에서 바다를 보다.  (9) 2024.10.15
내가도서관  (20) 2024.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