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건평돈대에서 바다를 보다.

대빈창 2024. 12. 2. 07:30

 

나의 돈대를 향한 한여름 여정은 서너 번 헛걸음만 반복했다. 내비가 가리키는 목적지는 해안도로에 잇댄 깎아지른 바위절벽을 덮은 우거진 칡넝쿨 뿐이었다. 진입로는 찾을 수 없었고 낙석방지용 키 높은 철책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낙엽 지는 계절의 나목이 드러나길 기다렸다. 건평乾坪돈대墩臺를 검색했다. 돈대를 찾아가는 길을 포스팅한 블로그를 만났다. 어이없게 돈대가는 길은 내가 읍내 일을 보고 섬으로 돌아가는 포구로 향하는 지름길에서 시작되었다.

이정표도 입간판도 없었다. 건평항 삼거리의 양지 방면으로 들어서면 바로 좌측에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나타났다. 구불구불 마을길을 1㎞ 남짓 서행했을까. 키작은 나무 이정표가 보였다. 산으로 오르는 초입에 바위가 길을 막았다. 차를 버리고 산길을 탔다. 인적 없는 고즈넉한 산길에서 자꾸 머뭇거렸다. 이 길이 맞는 길인가. 바다가 보이면서 돈대가 나타났다. 해발 105m의 노고산은 해안에 바투 붙었고 돈대가 어깨 발치에 자리 잡았다.

2017년 4월 인천시립박물관은 돈대를 조사하던 중, 16세기 이후 조선군의 주요 화포였던 불랑기佛狼機 모포母砲 1문을 발굴했다. 불랑기포는 유럽에서 전해진 서양식 화포로 당시의 최첨단 무기였다. 현대식 화포처럼 포 뒤에서 장전하는 후장식 화포였다. 불랑기는 포신인 모포와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子砲로 분리되었다. 모포 뒷부분에 자포를 삽입하여 불씨를 점화했다.

지금까지 모포와 자포를 포함해 12문 가량이 확인되었는데 출토지가 분명치 않았다. 2009년 서울시 신청사 부지(조선시대 군기시 터, 병기 제조 관청)에서 발굴된 보물 제861호(1563년 제작) 자포가 유일했다. 몸체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불랑기의 제작 시기, 관리자, 장인 및 실무자를 알 수 있었다.

 

康熙十九年 二月 日 統制使全等江都墩(皇)上佛狼機百十五 重百斤 監鑄軍官折衡 申淸 前推管 崔以厚 前萬戶 姜俊 匠人 千守仁

강희19년(1680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 등이 강도돈대에서 사용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어 진상하니 무게는 100근이다. 감주군관 절충장군 신청, 전추관 최이후, 전만호 강준, 장인 천수인

 

돈대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38호로 지정되었다. 돈대 안에 도로시설물 러버콘rubber cone이 여기저기 서있었다. 지난여름 폭우에 돈대 석벽이 많이 무너져 내렸다. 돈대로 들어서는 출입구 쪽 석벽은 폐허에 가까웠다. 중장비 진입이 쉽지 않은 천연의 요새는 복구공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돈대에서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돈대처럼 어머니 몸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입동날 저녁 김장 무채를 써는 아들 형제를 어머니는 처연히 바라보고 계셨다. 일이 마무리되자 당신은 방으로 가시려고 목욕의자에서 일어나셨다. 어머니가 갑자기 뒤로 벌러덩 넘어지셨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자주 넘어지셨을 것이다. 자식들이 걱정할까 숨겨 오신 것이 분명했다. 뇌동맥류의 직접적인 영향일까 아니면 파킨슨병의 증상일까.

어머니의 골절이 두려웠다. 막상 다치시면 후회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슬쩍 요양병원을 권했다. 섬 할머니들이 모여 계신 곳이면 외롭지 않으실 것이라고. 막내아들 돈 많으니 걱정 마시라고. 어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다 서럽게 눈물을 쏟으셨다. “우리 ○○이가 내 죽을 때까지 똥오줌 다 받아준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고명딸을 떠올리셨다. 형제는 어머니를 끝까지 집에서 모시기로 마음을 굳혔다. 작은형은 인천 댁으로 돌아가자마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취득 학원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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