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남도(南道), 1996년 여름 - 5

대빈창 2011. 7. 8. 05:25

 

아침 햇살이 부드러운 비단결 같았다. 나는 배낭을 꾸려 민박집을 나섰다. 부용동 원정으로 향하는 나즈막한 고갯길 바른편은 해송숲이 여행자의 발걸음과 함께 한다. 왼편은 얕으막한 바위산에 듬성듬성 상록수가 바위에 억센 뿌리를 내렸다. 고개를 넘으면 해송숲이 끝나고 바다가 섬의 옆구리를 깊이 베어 먹었다. 제주도를 향하다 보길도의 수려한 산세에 반해 고산이 닺을 내린 곳은 현재의 청별 포구가 아닌 이곳으로 짐작된다. 몇 채의 가옥과 다랭이 논이 좌우로 어린애 소꼽장난마냥 오종종하다. 다시 낮은 언덕이 시작되고 왼편 구릉에 소나무가 자리잡았고, 오른편은 제법 굴곡진 산세가 이어졌다.

세연정 입구 계곡 하류에 아침부터 할머니 세분이 무릎까지 몸빼를 걷어 올린 채 계류에서 채질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 지금 뭐 잡으시고 계세요."

민물새우. 계곡 양안의 수초를 채로 걸러내어 새우를 잡았다. 몇 번 헛손질을 해야 겨우 채 바닥에 두서너 마리의 까만 새우가 팔짝팔짝 뛰었다. 그래도 할머니들은 손자 과자값은 된다고 연신 채질하기에 여념이 없다. 울창한 동백 잎새로 세연정에 싱그러운 햇살이 쏟아졌다. 이슬을 머금은 회수담의 연잎이 햇살을 되쏘았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 무더기는 더욱 화사해진 듯 하고, 동백의 검붉은 열매는 맺힌 이슬을 물방울로 떨구었다. 연못 위에 늘어진 가지는 햇살을 가려 고기들의 휴식처로 그늘을 드리웠다. 세연정 옆 부용초등학교에서 가락이 어수선한 장구질 소리가 들렸다.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이들이 배우는 풍물패 소리 이리라. 세연지 가장장리에서도 한 분의 할머니가 채질을 한다.

"토하젓깔을 겁나게 비싸부러." 잠시 채질을 멈춘 할머니가 허리를 몇 번 툭툭 치고는 억센 사투리로 말문을 열었다. - 연죽방(회수담)에서는 연꽃이 다친다는 이유로 새우잡이가 금지 되었고, 어기면 백만원의 벌금이란다. 토하(민물새우)는 농약을 뿌리지 않은 시절에는 가을 추수후 논의 물을 빼면서 물꼬에 가마니를 대면 몇 가마는 쉽게 잡았다. 지금 토하는 워낙 희귀한지라 잡은 양은 얼마 안돼도 쌈짓돈은 된다. -

세연정을 지나 계곡 상류의 잡초가 우거진 공터에 사람 키만한 비석이 서있다. - 보길공립국민학교 - 가난했던 시절 까까중머리의 보기 흉한 기계충 자국 같았다. 제 자리를 못잡은 비석에 못내 아쉬움을 남기며 걸음을 되돌렸다. 그때 오랜시간 세연정 입구 계단에 앉아 무연히 회수담의 인공섬에 눈길을 주는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책을 펼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책은 분명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펴낸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이 분명했다. 답사를 준비하면서 서점에서 몇 번 펼쳐 보았으나 끝내 손에 넣지 못한 책이었다. 혼자만의 여행에서 오는 쓸쓸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세연정의 풍광이 주는 운치 때문이었을까. 나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여행을 혼자 오신 것 같네요."

몇 마디의 대화로 어렴풋이 알게 된 그녀는 부산에서 혼자 고산의 유적지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 그녀는 책에 사진이 실린 판석보가 입구에 서있는 안내도라면 이 부근일텐데 보이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세연정 입구의 안내도는 고지식하게 방위에 맞추어 그림을 그렸다. 실제 북쪽이 입구로 여행자는 안내도를 거꾸로 보아야 세연정의 평면도를 그릴 수 있었다. 세연지와 계곡 하류를 막은 판석보는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본연의 보 역할과 옥소암으로 향하는 다리도 되지만 수량이 풍부한 장마철에는 시원한 물줄기를 하류로 떨어 뜨리는 폭포가 되기도 한다. 판석보로 안내한 나에게 그녀는 고마워했다.

10시 5분 카페리는 노화도와 보길도의 협해를 따라 땅끝을 향해 흰 포말을 꽁무니에 매단 채 앞으로 나아갔다. 마주보는 노화도와 보길도의 선착장 정경은 대조적이다. 철지난 휴가철의 보길도는 가게들이 한낮에도 셔터를 내려 인적이 뜸해 적요한 기운이 감돈다. 반면 노화도는 5일장의 북적거리는 인파로 단연 활기를 띠고 있었다. 보길도 사람들의 삶은 여름 한철에 집중되었고, 노화도는 생활권역의 중심이었다.

멀어져가는 카페리의 고물에서 바라보는 두 섬의 이미지는 노화도가 강렬한 햇살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장정이라면 보길도는 신열에 들뜬 핼쓱한 처녀 같았다. 세연정에도 겨울이 찾아 올 것이다. 회수담의 연근은 진흙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연꽃의 꿈을 키우고, 얼음장 밑에서 토하들은 새끼를 칠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