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의 부용동 원정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 진다. 고산이 거처한던 살림집인 낙서재 주변, 마주보이는 앞산 기슭에 자리잡은 휴식공간인 동천석실 그리고 놀이터라 할 세연정이다. 포구에서 가장 안쪽인 격자봉 아래에 자리잡은 고산의 생활터전인 낙서재는 말그대로 터만 남았다. 보길도에서 가장 좋은 터로 알려진 낙서재에는 동백과 황칠나무만 빼곡히 들어차 햇빛을 가렸다. 몇 개의 주춧돌이 땅위로 빼꼼이 머리를 내밀고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객의 손길이 동백의 그루터기에 작은 돌탑으로 정감있게 남아있었다. 산중턱에 위치한 동천석실은 엄두가 안나 나는 곧장 세연정으로 나왔다.
청별 선착장에서 걸음으로 20분 거리인 부용초등학교 옆에 세연정(洗然亭)은 자리 잡았다. 계곡을 막아 인공 연못으로 꾸민 세연정은 계곡 하류에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세연정을 빙 둘러선 흙담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동백, 배롱나무, 녹나무의 상록수가 울창하다. 세연정 입구 오른편에 사람키만한 안내판에는 이렇게 써있다. - 甫吉島 尹善道 遺蹟(사적 제368호) - 孤山(1587 ~ 1671)은 여러차례 정치적 다툼으로 유배생활을 한다. 그가 고향 海南에 있을 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仁祖는 이미 남한산성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 항복한 후.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제주도로 가는 길에, 이곳 보길도의 산세의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문다. 보길도는 인조15년(1637) 51세때 이곳에 들어와 별서(別墅)를 짖고 13년간 글과 정서를 닦으며 漁夫四時詞등 시가를 지은 국문학 창작의 산실이다.
세연정은 자연 계곡물을 돌담으로 막아 연못 세연지를 만들고 다시 수구를 통해 물을 끌어들여 네모진 연못 회수담을 꾸렸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수구인데 물이 들어가는 쪽의 구멍은 5개고, 나오는 쪽은 한자 가량 낮게 위치하여 구멍이 3개다. 수압을 높이기 위한 시설이라고 한다. 계곡하류 입구에서 들어서면 동대와 서대가 양옆으로 서있고 대 위에는 동백이 세월을 자랑한다. 수구 위를 건너면 세연정이 맞아준다. 흔히 정자는 자연풍광을 감상할 수 있도록 사면이 트이고 바닥은 대청이 놓였는데, 세연정은 특이하게 대청 중앙에 온돌이 설치되었다. 마루는 한 단계 높게 쌓였는데 밑에 아궁이가 뚫려 겨울에도 기거할 수 있다. 온돌방과 한턱 높은 마루의 공간에는 문고리가 달린 서탁이 앉았다. 아마 고산의 지필묵이 단정하게 놓였으리라. 여름이라 정자는 사방벽을 트였는데 우리가 흔히 한옥에서 보는 미닫이가 아닌, '경첩'처럼 접을 수 있어 쇠줄로 석가래에 잡아맸다. 겨울에는 고리를 풀면 벽이 되어 삭풍을 막았을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정겹게 벗한 세연정의 풍광은 한마디로 아기자기하다. 계류의 급류를 막으려 지그재그로 덩치 큰 바위들이 세연지에 배치되었고, 서너사람 들어설만한 회수담의 인공 섬에는 배롱나무의 자태가 유난하다. 회수담을 둘러친 흙담에는 동백의 두터운 잎사귀 새로 검붉은 열매가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몇 개는 땅바닥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세연정으로 들어오는 계류의 상류 흙둔덕에 올라 격자봉 아래 낙서재를 바라보면 흡사 글래머 여인이 가랑이를 벌리고 누운 정면 그림이다. 삼국유사 기의편에 실린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知幾三事' 설화가 전해오는 월성 여근곡의 지형과 매우 흡사했다.
보길도에는 택시가 전부 4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중 2대가 지프 갤로퍼로서 머리에 '중형택시'라는 관을 썼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없는 낯선 풍경이다. 선착장에 내린 학생들이 택시 갤로퍼의 주고객이다. 산굽이마다 들어 선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비포장인 보길도의 유용한 운송수단인 것이다.
예송리 해변은 섬의 동남쪽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 지형 생김새가 완도의 정도리 구계등과 아주 비슷햇다. 활처럼 휘어진 해안선과 구계등의 애기 머리만한 자갈보다는 작아 손안에 착 감기는 둥글납작한 오색자갈들이 해안을 뒤덮었다. 파도가 들고 날 때마다 서로 몸을 부딪히며 귓가를 간지럽히는 해조음까지도. 자갈 해안 뒤편으로 상록수 방품림이 펼쳐졌다. 북적거리던 피서객들이 떠난 철 지난 해안에는 여기저기 쓰레기만 널렸다. 파장한 5일 장터처럼 쓸쓸했다. 한가롭고 적요한 자갈해안을 푸근하게 감싼 상록수림의 풍치가 시들은 나의 정서를 새롭게 환기시킬 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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