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남도(南道), 1996년 여름 - 2

대빈창 2011. 6. 10. 03:01

 

나는 지체없이 택시를 불렀다. 정도리 구계등. 매년 문학사상사에서 1년간 지면에 발표된 중·단편소설 중 이상문학상 심사위원회에서 작품성의 우열을 가려 1편의 당선작과 대여섯 편의 우수작을 묶어 이상문학상 작품집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하고 있다. '77년도 제1회 대상작으로서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이 선정된 이래 '96년은 20회를 맞아 90년대 한국문단을 이끌고 가는 젊은 작가 윤대녕에게 돌아갔다. 수상작은 '천지간'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정도리 구계등이다.

택시는 완도읍에서 서쪽으로 4㎞를 달려 해안에 접한 한적한 마을어귀에 나를 내려 놓았다. 나는 배낭을 어깨에 걸친 채 좌우로 몇 채 안되는 마을집들을 지나 바닷가로 나섰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 한적하게 보이던 마을 정경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다다르자 떼거지의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소방차에 매달린 고가사다리에서는 물줄기가 쏟아져내렸고,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생겼는 지 수십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려 에워쌓았다. 흡사 시골 장터에 나타난 곡마단의 구경꾼들 같았다.

나는 바닷가의 정도리 구계등 안내판 앞에 섰다. - 이 구계등은 남해의 거친 파도에 자연히 연마된 아름다운 표면을 가진 다섯 종류의 갯돌 靑丸石(청환석)이 활 모양의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자갈밭의 연장은 735m, 폭 83m 이다. 명칭의 유래는 해저까지 아홉 계단을 이룬 장관을 애칭으로 해 전해지고 있다.

나는 왠만한 애기 머리만한 돌들로 뒤덥힌 해안가로 내려섰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시원한 소나기를 쏟아부을 듯한 얼굴로 무겁게 가라앉 아 있었다. 소설 천지간에서 묘사된 것처럼 정도리 구계등은 그리 우수에 젖게 만들거나 낭만적인 풍광은 아니었다. 횟집들이 바닷가에 줄지어 서있고, 자갈 해안에는 파한 장터의 몰골처럼 여기저기 쓰레기가 바닷바람에 쓸려다녀 어수선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소나무 숲은 폭좁은 구릉에서 옹송거렸다. 밀물이 들면서 점차 자갈들을 파먹어 들어왔다. 그때 찌릉 찌릉...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닐낚시에서 울리는 방울소리 같았다. 아! 이 소리가 파도가 들고 날때마다 갯돌끼리 부딪히면서 내는 해조음이구나. 앞바다를 삼태기 테두리처럼 섬들이 올망졸망 에워싸고 있었다. 고기잡이 어선 몇 척. 점점이 떠 있는 그물을 고정시키는 흰 부력. 나는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소나무숲을 배경으로 한 촬영 현장을 에워싼 마을 사람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던 아낙네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다리품도 줄일 겸 민박을 정했다. 어느 유원지나 매한가지로 일자형 건물에 방을 여러 개 들이고 출입문 옆에 취사 겸 세면용 수도를 설치했다. 저녁 8시 안마당에 놓인 평상에 저녁이 차려졌다. 2남6녀를 모두 출가시킨 초로의 민박집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섬이라 그런지 밥상에 오른 찬이 해물 일색이다. 꽃게장, 생선찜, 매운탕... 시장하던 참에 입맛에 맞는 찬이 식욕을 당긴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했다. 식사를 마친 바깥어른이 명함을 내민다. 건네진 쪽지 이마에는 '청해민박 - 완도농협 조합원 1번 대표 - 라고 적혀 있다.

구계등 바닷가로 나오니 여전히 야간촬영으로 해안에 접한 횟집 겸 민작집 주위는 사람들로 술렁거렸다. 하늘에는 별빛이 총총하고, 보름을 향한 살진 반달이 중천에 걸려있다. 나는 너럭바위에 겉터 앉았다. 들물이다. 점차 물속으로 잠겨드는 너럭바위 정수리에 물결이 부딪혀 흰 포말로 아우성친다. 구계등 앞바다를 원형으로 감싼 섬들. 그 섬들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인가의 불빛이 정겹게 어둔 바다위로 번져갔다. 물에 잠겨 들어가는 검은 자갈들이 언덕위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밀려드는 물결에 자갈들이 몸을 비비며 내는 해조음이 촤르르 촤르르... 귓가를 간지럽힌다. 같은 소리인데도 낮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때 거대한 거북 한마리가 느릿느릿 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밀려드는 물살을 흰거품으로 튕겨내면서, 놈은 왕방울같은 눈을 휘번덕거렸다. 아니다. 그 놈은 살아있는 생물체가 아니라, 거북 형상을 한 바위로 구계등 해안에 태고적부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들물로 점차 잠겨 들어가는 바위가 흡사 해안가 모래에 알을 낳고 바다로 되돌아가는 거북처럼 보였다. 놈은 마침내 물 속으로 완전히 미끄러져 들어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