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지은이 : 송경동
펴낸곳 : 창비
어느날/한 자칭 맑스주의자가/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허둥대며 그가 말했다/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표제시인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의 1연이다. 이 시집은 문단에서 현장, 거리의 시인으로 불리우는 저자의 두번 째 시집으로 2010년 제12회 '천상병 시상' 수상작이다. 시집에는 모두 4부에 나누어져 56편의 시가 실려있다. 그중 나의 눈길은 1부와 3부에 실린 시편들에 한참 머물렀다. 그렇다. 표제시에는 20여년 전 나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때 운동권은 출신성분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시인에게 조직활동을 함께 하자는 학출(학생 출신)과 시인처럼 노출(노동자 출신)로. '조국해방전선'으로 미루어보아 학출은 ML계열로 보인다. 그 시절 노선의 갈등은 현재도 뿌리깊다. 현재 진보정당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열되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대의에 따라 통합을 모색하고 있지만. 1부에는 공사판의 일용직 용접공과 석유화학단지 배관공 보조를 거쳐 가리봉동 닭장촌 지하방으로 내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서글픈 인생여정이 그려진다. 자연히 그 시절 가리봉동 벌통방 시절의 회한이 스쳐 지나간다. 시인은 라면과 부탄가스로 끼니를 해결(?)하고, 오거리에서 옛 선진노동자들과 돼지껍데기을 안주삼아, 소주를 들이키며 서글픔에 젖는다. 3부에 실린 11편의 시편은 투쟁과 추모시다.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 낭독시, 건설일용노동자 하중근, 노점상 이근재선생님, 멕시코 깐꾼 이경해 열사, 택시운전사 허세욱 열사, 용산참사 희생자 영전에 바치는 추모시와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촛불투쟁,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콜트·콜텍 노동자 연대 그리고 MB의 '4대강 운하' 반대 투쟁시편들이 실려있다.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생각해보니 작년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구로역 CC카메라탑을 점거하고/광장에서 불법 텐트 생활을 하기도 했다/국회의사당을 두 번이나 점거해/퇴거 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전엔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
'무허가'의 1연이다. 시인의 시편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불편하고 몹시 부끄러웠다. 가난한 자에게 지옥같은 21C 이 땅의 참담한 현실에서 시인은 엄혹하고도 치열한 삶을 살아가면서 시편을 길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시에는 말장난에 의한 '시를 위한 시'가 없다. 자본과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기죽지 않고, 가난하고 힘없고 못 배운 자들과 어깨를 겯는 시인의 시에서 7,80년대의 김남주나 백무산이 읽혀진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노동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어서,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시를 쓴다'고. 이 땅의 현실은 매일이 '참, 좆같은 풍경'의 파노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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