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지은이 : 박경희
펴낸곳 : 창비
『벚꽃 문신』(실천문학사, 2012) /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창비, 2019) /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
시인 박경희(朴卿喜, 1974- )는 2001년 『시안』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산문집과 동시집을 제외한 지금까지 펴낸 세 권의 시집이었다. 나는 최근 시집을 먼저 잡았고, 연이어 두 번째 시집을 손에 들었다. 4부에 나뉘어 55편이 실렸다.
시인 안상학은 표사에서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도 없고, 이승과 저승의 거리”도 없다고 했다. 시인 김해자는 발문 「중첩된 시선으로 들여다본 탈개인화된 세계」에서 “짐승과 인간과 식물이 관계하고 회통하고 통섭하면서 다양성과 섞임과 유동성을 통해 숨 쉬는 생명체가 되는 경이를 가난과 결여가 곧 고통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경험”(85쪽)할 수 없다고 했다. 시집은 ‘애잔한 서정과 떠나간 이들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한 푸근한 일상의, 고향마을의 질박한 삶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죽은 애비 찾는 치매 할머니, 삭발을 미루는 주지스님, 어머니 염색한날 밤 옻오른 시인, 아내 생일에 폐암말기 두달 시한부 선고 받은 남자, 용한 점쟁이가 점지해 준 오점지 할아버지, 자면서 크게 웃는 어머니, 암투병하는 아내에게 무당에게 배워 꽹과리 쳐주는 사내, 나물 판돈 전대를 두르고 버스바닥 신문지 깔고 앉은 성주 할매, 새벽에 사라진 임신한 미친 여자, 절에 가는 큰일 아랫마을 제순 할매, 바짝 쪼그리고 저승 간 옆집 황소 아줌마, 개와 싸우는 술 취한 사내, 엄지손가락 잃고 노름 끊은 이씨 아저씨, 재산 몽땅 가지고 사라진 며느리, 녹내장으로 눈먼 앵두나무집 할머니, 드렁허리 고아먹고 벙어리 낳은 윗집 새댁, 류머니티스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굽은 어머니, 고엽제를 뒤집어 쓴 베트남전 참전용사, 셋방에서 쫓겨나 모퉁이에서 담배 피는 남자, 빚쟁이에 쫓겨 화장실에 숨은 여자.
표제시는 찾을 수 없었다. 「팔자八字」(22쪽)의 ‘삶의 그늘을 퍼내라는 것인지’, 「그늘을 당겼다놓은 집」(48쪽)의 ‘그늘을 당겼다놓은 감나무 그늘처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집」(64쪽) ‘상수리나무의 그늘이 옷깃을 잡는데’가 나의 눈에 뜨인 구절들이었다. 1부 마지막 시 「참 좋은 날」(24쪽)의 전문이다.
은행잎이 11월 그늘을 끌어들이자 사그락사그락 햇살이 궁구르는 길 위로 진눈깨비 날렸다 벼 바심 끝난 논바닥에 내려앉은 구름이 웅덩이 속에서 흘렀고 서리 맞은 호박잎이 밭머리에 누렇게 스러져가는 바람을 흔들었다 발자국으로 내려놓은 이파리 위로 번진 노을 가슴에 담아놓고 가도 좋은 것을 벚나무 그늘이 깊어서 쓸쓸함이 박새 발가락으로 흔들렸다 나를 스치는 것들이 햇살에 부딪쳐 스러지던 날 아우, 저승길 걷기에 참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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