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광야

대빈창 2025. 3. 10. 07:00

 

책이름 : 광야

지은이 : 정찬

펴낸곳 : 문이당

 

“내게 정찬은 숲속을 걷다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는 세상 같다. 그의 활자들은 칼춤을 춘다. 어렵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치열함을 견뎌야 한다.”(58쪽)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교양인, 2020)

 

평화학·여성학 연구자 정희진(鄭喜鎭, 1967- )의 글은, 소설가 정찬(鄭贊, 1953- )의 작품을 다시 찾게 했다. 책장에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문학과지성사, 2003)가 유일했다. 작가는 1983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중편 「말의 탑」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현실과 소설언어의 성찰, 신과 구원의 문제에 대한 천착, 가장 무게 있는 작가정신’으로 평가되어 왔다.

군립도서관을 검색했다. 아쉽게도 장편소설 『광야』(2002) 한 권 뿐이었다. 1,400장 분량의 장편소설은 1980년 ‘5월 광주’를 다루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 광주의 진실을 알려고 두리번거렸고 발품을 팔았다. 영화, 소설, 시, 다큐맨터리, 회화, 민중가요… 장르별로 셀 수 없는 많은 작품이 형상화되었다. 장편소설은 임철우의 다섯 권짜리 『봄날』(문학과지성사, 1997)이 먼저 떠올랐다. 나에게 소설집은 홍희담의 『깃발』(창비, 2003)이었다.

『광야』의 시간적 배경은 1980년 5월 18일 오후 4시부터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함락된 26일 새벽까지 였다. 소설의 시작은 미국 〈볼티모어 선〉지 베를린 특파원 테리 머턴이 1989년 11월 9일 밤 11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1980년 5월 서울 특파원으로 광주 취재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작가는 긴박하게 전개되는 사건을 쫓기 위해 화자話者를 다양하게 내세웠다. 위장취업자·활동가 박태민, 공장노동자·조직원 김선욱, 도청으로 들어간 신부 도예섭, 무장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 12·12반란 수괴 전두환, 11공수여단 특전단 강선우 하사,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턴.

이외에도 작품에는 수많은 실제, 가상 인물이 등장했다. 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퀸터 샤보프스키, 합법적 노동운동 조직을 꿈꾸는 활동가 한준오, 독일 텔레비전 카메라 기자 유르겐 헌츠페터, 무장시민군을 이끌고 도청으로 들어간 김원갑, 빈민운동가 김영철, 기독교 농민회 윤기현, 한미연합 사령관 위컴, CIA 한국지부장 브루스터, 가두방송 전옥주, 죽음의 행진 김성용 신부, 윤공희 대주교, 조아라 YWCA 회장, 조비오 신부, 전교사 사령관 소준열, 이희성 계엄사령관……

특파원 머턴은 5월 광주를 취재하며 1968년 5월 파리혁명과 세계를 휩쓸던 냉전 이데올로기와 베트남 전쟁, 그리고 1948년 여순사건을 떠올렸다. 소설은 5개 장章으로 구성되었다. 그해 5월, 운명, 해방, 광야, 역사의 영혼.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현장에서 특파원 머턴은 ‘5월 광주’의 죽음을 알면서 도청으로 들어가는 활동가 박태민과 신부 도예섭을 떠올렸다. 도예섭 신부는 도청으로 향하면서 머턴에게 말했다. “도청의 젊은이들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거짓의 형상을 깨뜨리는 유일한 무기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임을. 도청이 그리스도의 집인 까닭을 알겠습니까?”(300쪽)

1980년 8월 6일, 신군부가 마련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서울롯데 호텔 에멜란드 룸에서 열렸다. 한국교회 각 교파 지도자 스물세명이 모였다. 학살자의 우두머리는 피의 입으로 주님의 은총을 요구했고, 교회 성직자들은 그를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극우 기독교도들은 계엄령에 실패한 대통령 윤석열을 추종했다. 구속영장을 발부한 법원을 때려 부수었다. 한겨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반대 집회를 열었다. 도대체 이들이 믿는 주님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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