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해방일기 10
지은이 : 김기협
펴낸곳 : 너머북스
『해방일기 10』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대한민국 건국과정이 본궤도에 들어서는 시기를 다루었다. 한독당과 중도우익은 5ㆍ10선거를 보이콧, 민족주의자들은 남북협상을 향해 평양 길에 올랐다. 이승만의 권력욕은 내각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었고, 한민당은 제1야당으로 출발했다. 10권의 부제는 ‘해방을 끝장낸 분단건국’으로 시간대는 1948. 5. 1 ~ 8. 14. 이었다. 차례는 4장으로 구성되었다. 10권은 각 장의 말미에 실은 저자와 안재홍 선생과의 가상대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가 시작하며 한 개가 추가되어 모두 다섯 개였다.
1장 해방 조선의 비극을 대표한 제주 ‘폭동’(1948. 5. 1 ~ 29). 1948. 5. 1. ‘오라리 방화사건’은 경찰 소행으로 미군정은 토벌정책으로 선회. 제주 4ㆍ3의 새벽에 움직인 유격대는 남로당원의 일부에 불과, 대다수는 경찰과 우익단체의 횡포에 맞서려는 일반주민들. 12일간의 등록기간에 등록 대상자의 80퍼센트를 등록시키려고 온갖 협잡과 폭력이 횡행, 부정부패 선거는 단 하루 선거일에 90퍼센트 이상 투표. 이남 당국의 전력대금 지불이 원활치 못해도 이북 당국은 민생과 직결되는 송전 문제를 정치와 분리해서 배려. 소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넘겨받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11월 시행된 선거를 준비ㆍ관리, 이남의 48년 5ㆍ10선거는 미군정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시행. 극우의 이승만과 한민당의 민족주의 표방은 좌익을 배척하는 수단, 그들의 해방전후 모든 노선은 반민족적.
2장 유엔은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1948. 6. 3 ~ 28). 1948년 7월 선포된 대한민국 헌법 내용을 준비하는데 압도적 역할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독도 인근에서 조업하던 수십 척의 어선에 일본주둔 미국 비행대의 폭격으로 수십 명 어부가 사망한 1948. 6. 8. ‘독도폭격사건’. 1950년대 야당 지도자의 간판에 가려진 조병옥의 진면목은 난폭한 파시스트에 더해 극히 간사하고 음흉한 인물. 반공의 명분에 이용하기 위해 미군정과 경찰 수뇌부는 제주도를 ‘공산 혁명의 기지화’로 조작. 1948년 초 사이에 임금은 170배, 물가는 1,190배, 통화량은 190배 상승, 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의 7분의 1에 불과.
3장 독재의 길을 닦은 이승만(1948. 7. 3 ~ 29). 5ㆍ10선거 보이콧으로, 제헌의회는 좌익ㆍ중간파의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의 이익균점법같은 사회주의적 원리가 헌법에 도입된 것은 중간파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의 상당한 역할. 이북 정권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배합을 지향하는 것으로 민족주의자로서는 합리적 선택. 미국은 발전선 전기요금을 경성전기 등 전기회사에서 받았는데, 그 값은 이북에서 송전한 전기값의 수십배. 기초위원회에 대한 이승만의 개입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안의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꾼 것. 좌익을 탄압하고 중간파를 배제하면서 정권을 잡은 반동세력 이승만과 한민당은 정권운용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충돌. 대한민국 역사가 어둡고 괴로운 길을 걷게 된 데는 이승만 같은 공공성 의식이 없는 인물이 큰 권력을 쥐게 된 것이 중요한 이유.
4장 독립 아닌 건국(1948. 8. 2 ~ 14). 이승만의 술수는 이윤영을 먼저 지명하여 부결을 유도하고 족청을 친위세력으로 삼는 이범석 국무총리 기용. 해방당시 세 배로 늘어난 경찰 인원은 이승만이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가장 중요한 무기. 일제강점기에도 없었던 국가경찰 제도는 미군정하의 남조선을 경찰국가로 만드는 핵심조건. 해방 후의 가장 긴절한 과제였던 친일파 정리가 미군정 치하에서 3년을 늦춰지더니 칼자루가 친일파의 손에. 일본제국주의 추종자 처단이 세상에서 제일 철저하게 가로막혀 있던 곳이 남조선. 농림장관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은 반 년 만에 장관직을 떠났지만 토지객혁의 기초를 닦았고, 1948년 9월 14일 국회에 제출된 양곡매입법은 정부수립후 가장 큰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책.
‖연재를 끝내며‖ 「내일의 민족주의를 생각한다」에서 역사학자는 말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한국인이 염원하던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 노선을 벗어난 정권을 세워주웠고, 그 결과 한국인은 전쟁과 독재를 겪어야 했습니다. 독재정권은 지식인의 양심적 활동을 억압하는 일본 식민지배의 민족탄압 정책을 이어받았습니다.”(507쪽)
2011년 4월 첫 권이 출간된 지 4년 만에 『해방일기』 시리즈 열권이 완간되었다. ‘일기’는 총 501회, ‘안재홍에게 묻는다’는 48회로 원고지 매수로는 18,120매 분량이었다. 역사학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물었다. “냉전의 압력에 기대어 민심을 억누르던 독재체재가 20여 년 전 끝난 뒤, 이번에는 신자유주의의 압력에 기대어 민심을 휘두르는 엘리트연합 체제가 이 땅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총칼이 아니라 돈의 힘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65년 전에 비하면 외부 압력은 줄어들고 내부 역량은 늘어났는데도 이 사회가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꼴을 몽양 선생이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