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와사등

대빈창 2025. 8. 12. 07:00

 

책이름 : 와사등

지은이 : 김광균

펴낸곳 : 열린책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우두雨杜 김광균(金光均, 1914-1993)하면 떠올려지는 시 「추일서정秋日抒情」의 전문이다. 이 땅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교과서에서 만났던 詩였다. 1940년 『인문평론』에 발표되었고,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되었다.

시인은 1926년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인부락〉,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첫 시집 『와사등』을 남만서점에서 출간, 1947년 두 번째 시집 『기항지寄港地』를 정음사에서 출간, 1957년 세 번째 시집 『황혼가』를 산호장에서 출간, 1986년 네 번째 시집 『추풍귀우秋風鬼雨』·1989년 다섯 번째 시집 『임진화壬辰花』를 범양사에서 출간. 

내가 잡은 『와사등』은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으로 선보인 시집이었다. 출판사는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출간 10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시 초기를 빛낸 스무 권을 가려 출간했다. 나는 열한 권을 손에 넣었다.

첫 시집 『와사등』은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했던 「오후의 구도」를 비롯하여 총 22편의 시를 수록했다.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말했다. “시들은 대부분 회화적이고 비유적인 이미지로 포착된 근대의 풍경과 그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우수를 노래하며, 당시로서는 새로운 감수성”(56쪽)을 보여주었다. ‘와사등瓦斯燈’은 석탄가스를 이용해 불을 밝힌 도시의 가스등이었다. 근대 도시문명 속의 개인의 고독과 우수를 노래한 시였다. 마지막은 표제시 「와사등」(38쪽)의 전문이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빈 하늘에 걸려 있다 / 내 홀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문다 //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 낯선 거리의 아우성 소리 /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빈 하늘에 걸리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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