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현해탄

대빈창 2025. 9. 29. 07:00

 

책이름 : 현해탄

지은이 : 임화

펴낸곳 : 열린책들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 연거푸 말은 권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1929. 2.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된 「우리 오빠와 화로」의 1·2·3연이다. 10연 43행으로 이루어진 詩는 고된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는 노동 일가 삼남매의 구체적인 삶과 사회적 의지를, 누이동생이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에 담았다. 한국문학의 풍운아 임화하면 나에게 떠오르는 시였다.

임화(林和, 1908-1953)의 본명은 인식(仁植)이었다. 서울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난 임화는 13살에 보성중학에 들어갔다. 집안이 파산하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했다. 초창기 다디이즘 계열의 시를 썼던 그는 1926년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했다. 1927년부터 임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시인은 주요 이론가로 조직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빼어난 미남으로 김유영 감독의 카프계 영화 〈유랑〉과 〈혼가〉의 주연 배우로 ‘조선의 발렌티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9년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를 발표하며 카프의 대표 시인으로 떠올랐다. 1932년 24살로 카프 서기장이 되었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1935년 조직 해산서를 제출했다. 1945년 8·15해방과 함께 다시 활동의 전면에 등장했다. 좌파 문인의 핵심인물로 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했다. 1947년 월북한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서울에 나타났다. 박헌영 남로당 길을 걸었던 임화는 1953년 8월 6일 마흔다섯의 나이에 사형당했다.

혁명적 지식인 임화의 활동 영역은 넓었다. 그는 창작·이론·비평에서 당대 최고의 성취를 보여 준 전방위 작가였다. 그의 대표시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 보여 준 ‘서사 단편시’를 최초로 시도한 시인이었다. 문학이론가로서 그가 구축한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은 현재형의 이론으로 살아있다. 임화는 말했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현실이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부단히 변하고 발전하며 소멸하는 긴 과정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시집의 텍스트는 1938년 2월 29일 동광당 서점에서 출간된 초판본이다. 임화의 카프가입 초기 시들은 투쟁 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서간문 형식과 서사적 구도를 취했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에게 이야기하는 어법을 사용했다. 『현해탄』의 시들은 문장의 호흡이 길고, 긴 시로 41편의 시가 실렸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해설 「임화와 『현해탄』」에서 말했다. ‘암울한 시대를 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드높은 낭만적 열정과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해보려는 지식인의 절박함 심정'(191쪽)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은 시집을 여는 첫시 「네거리의 순이」(7-10쪽)의 1·2연이다.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의 순이야! /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 내 사랑하는 동무는…… / 쳥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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