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가기 전에 쓰는 글들

대빈창 2025. 10. 23. 07:00

 

책이름 :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지은이 : 허수경

펴낸곳 : 난다

 

시인 故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의 내가 처음 잡은 책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이었다. 문학관련 서적을 펼칠 때마다 가장 눈에 뜨이는 시인이었지만 나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시인은 먼 이국땅 독일에서 눈을 감았다. 나는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군립도서관 검색창에 허. 수. 경. 이름 석자를 때렸다. 그리고 시인의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출판사 《난다》에서 나온 유고집으로 출간된, 산문집 『오늘의 착각』(2020)과 시해설집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2020)를 잡았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2000)을 펼쳤다. 그리고 유고집으로 나온 『가기 전에 쓰는 글들』(난다, 2019)과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을 대여했다.

책은 3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시인이 2011년부터 노트북에 7년간 써내려간 시작메모를 시기별로 담아냈다. 내가 거칠게 메모한 시인의 詩에 대한 단상이다.

 

시간을 정확하게 해체할 수 없는 순간에 시는 온다. 어떤 시간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그 망설임의 순간에 시는 오는 것이다.(20쪽)

시인은 매 시기마다 자신의 탄생을 경험한다. 결국 첫 탄생에서 거듭 반복되는 불규칙한 탄생이 시인의 고통의 길을 완성케 한다.(59쪽)

시를 쓰는 일은 과연 인생을 걸고 내 일이라 여기며 살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언제나 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멍해지고 아프다는 사실이다.(189쪽)

시라는 것은 사물과 세계를 온전히 해설할 수 없음의 불가능에 대한 운문이다.(190쪽)

시를 쓸 때만다 이 시를 쓰고 나면 끝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 잡힌다.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를 쓰는 것인데 그 생각이 나를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265쪽)

예술을 하는 인간들의 근원적인 불안, 바로 예술은 예술 내의 필연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삶의 우연으로 생겨난다는 것.(308쪽)

 

2부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나온 이후 시인의 타계하기까지의 시 모음이었다. 모두 13편이 실렸는데, 5편은 활자화되었고, 8편은 미공개 시편이었다. 3부는 『문학동네』 2011년 봄에 실렸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작품론 「사랑의 그림자를 쫓기 위해 당신을 방문한 후기」, 『파란』2016년 여름에 실렸던 시론 「시인이라는 고아」 두 편의 글을 담았다. 《난다》 발행인 시인 김민정은 말했다. “시인이 직접 그 제목을 써서 정리해나간 생의 마지막 노트이자 속내”라고. 마지막은 2부의 첫시 「봄꿈」(310쪽)의 전문이다.

 

꽃무늬 바지를 입고 노인은 절집으로 향하는 수유꽃 노란길을 걸으신다 뼈가 가벼운 새들이 나무 위에서 잠에 겨운 꽃잎을 한 장씩 개키고 있다 절집에는 소풍을 가지 못한 얼굴들이 고기반찬 없는 상을 차리다가 병든 자목련을 바라본다 극락까지 가서 밥을 먹고 지옥으로 돌아오면 마을의 몇 안 되는 염소들은 실개울 곁에 앉아 간첩이 내려왔다는 뉴스가 박힌 신문을 우물거리고 있다 근처 큰 도시에 있는 술집에서 일하던 아가씨 셋이 개여울에서 변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이미 염소의 위장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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