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지은이 : 허수경
펴낸곳 : 문학동네
이로써 시인 故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의 군립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여섯 권의 책을 모두 섭렵했다. 그녀가 상재한 여섯 권의 시집에서 절반인 세 권을, 출판사 《난다》가 펴낸 유고집 세권이었다. 『빌어먹을 , 차가운 심장』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었다. 시집을 진즉에 잡았어야 했다.
2011년 출판사 《문학동네》는 파격적인 판형의 ‘문학동네 시인선’을 선보였다. 시리즈의 ‘특별판’은 기존 시집 판형을 두 배로 키웠다. 오늘날의 시는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의 비중이 커졌다. 단형 서정시 형태에 최적화된 기존 판형에서 벗어나 가로 방향으로 눕혔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최승호의 『아메바』, 허수경의 『빌어먹으르, 차가운 심장』, 송재학의 『내간체를 얻다』 세 권을 무녀리로 삼아 출범했다. 나는 ‘시리즈 001 특별판’을 손에 넣었다. 『아메바』는 시인이 기존에 펴낸 열두권의 시집에서 가져온 58개의 구절을 별도의 제목으로 삼아 왼쪽에 배치하고, 오른쪽에 그 구절들을 변주한 서너편의 이미지를 그렸다. 시리즈의 형식적 파격에 걸맞게 시편도 파천황이었다.
시인은 1992년 고고학을 공부하려 독일로 훌쩍 떠났다. 독일유학 10여 년만에 나온 시집은 고고학적 세계와 국제적 시야를 바탕으로 한 시인의 깊은 사유가 드러났다. 4부에 나뉘어 54편이 실렸다. 61쪽의 시편 「식물과 동물이 탄생하던 진화의 거대한 들판, 나라는 것을 결정하던 의지는 어디에 있었던가?」라는 긴 제목의 시는 내용이 단 한 글자, 부호도 없었다. 나는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가 1952년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소품, 〈4분33초〉를 떠올렸다. 연주 시간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은 음악 작품으로 유명했다.
장시 「카라쿨양의 에세이」(62-75쪽)를 읽어나가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인간은 산양의 연하고 부드러운 가죽털을 얻으려고 분만을 앞둔 어미를 죽이고 뱃속의 새끼를 취했다. 오비스 아리에스Ovis Aries라는 학명의 카라쿨양의 목소리로 인간의 탐욕성을 고발한 산문시의 처연함에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도 뜨지 못한 새끼양의 털가죽을 몸에 걸친 인간들은 누구일까. 오늘 먼동이 틀 무렵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 그 소리는 날카로운 고드름 가위가 되어 바람을 오려대고 있었다.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항거도 할 수 없는 한 포유류가 질러대는 소리였다.
시인은 말했다. “정치라는 거대 문제로 시작해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 등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이 ‘인간에 대한 냉소’에 있다고 생각해요. 정치 엘리트들이 말로는 평화를 위해서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에 대한 냉소’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심장이 차갑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은 시집을 여는 첫 시 「나의 도시」(12-13쪽)의 1~5연이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 /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 그러나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마치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 알렉산드리아처럼 울고 / 도서관에서는 물에 잠긴 책들 침묵하고 전신주에서는 이런 삶이 끝날 것처럼 전기를 송신하던 철마도 이쑤시개처럼 젖어 울고 // 나의 도시 안에서 가엾은 미래를 건설하던 시인들 울고 그 안에서 / 직접 간접으로 도시를 사랑했던 무용수들도 울고 울고 울고 // 젖은 도시 찬란한 국밥의 사랑 / 쓰레기도 흑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보랏빛 구릿빛 빛 아닌 살갗이었다가 / 랩도 블루스도 기타도 현도 방망이도 철판도 짐승의 가죽으로 소리 내던 북들도 젖고 //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울고 그 안에서 그렇게 많은 전병이나 만두를 빚어내던 이 방의 식당도 젖고 / 생선국 끓이던 솥도 고기 튀기던 냄비도 젖고 젓가락 숟가락 사이 들락거리던 버스도 택시도 어머니, 연을 끊지요, 라는 내용이 든 편지도 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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