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한자로 智異山이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서 전남, 전북, 경남 3개도의 남원, 구례, 하동, 함양, 산청 5개군에 걸쳐 그 둘레는 8백여리에 달하고, 1억3천만평의 넓이를 차지하고 있는 산세의 웅장함은 곧잘 어머니의 품으로 비유된다. 장대한 산줄기는 15개의 계곡을 품어 크게 두 갈래로 흐르는 물줄기를 만들어 하나는 경호강, 남강으로 낙동강에 흘러들고, 다른 하나는 섬진강을 만든다.
조선의 실학자 청화산인(靑華山人)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산을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으로 두류산이라고도 했는데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 한라산을 영주, 지리산을 방장이라 하여 삼신산으로 불렀다."고 소개했다. 또한 "병란, 재화, 생사를 다스리는 신령스런 별인 태을성이 사는 곳으로 여러 신선들이 모여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올 답사로 지리산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것은 나의 인식 속으로 새롭게 입력된 「백두대간」의 끝줄기 지리산의 최고봉 해발 1915m의 천왕봉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적 이 나이까지 한반도의 등줄기는 태백산맥으로 시작되는 일본식 산맥지형 개념을 아무 의미없이 받아들여 앵무새처럼 읊조렸던 자기회한에 대한 보상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땅위 산줄기는 땅속 지질구조와 일치한다고 보는 고또분지로 식의 지리학은 다름아닌 식민지 지하자원의 수탈을 염두에 둔 왜곡된 지질학적 연구로서 지금도 버젓이 지리교과서에 실려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정신사적으로 득별한 의미를 지니고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백두산은 조선 산줄기의 근원'이라고 한 지리학적 서술은 대동여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천지를 머리에 인 백두산에 이 나라의 모든 산틀과 산줄기는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1769년 여암 신경준이 펴낸 산경표(山經表)에는 이 땅의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하고, 백두대간을 모든 산줄기의 기둥을 삼았다.
백두산으로부터 국토를 굽이굽이 치달려 온 백두대간이 마지막으로 한껏 용틀임을 친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을 그리며 배낭을 쟁였다. 나는 가슴속에 산경표 원리의 핵심인 自山分水嶺 -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 을 가슴에 품고 여정에 올랐다.
문화유산의 해로서 '97년도에는 우리에게 수많은 답사안내서가 출간되어 나같은 문외한도 거리낌없이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이쪽 방면으로는 알맹이없는 빈껍데기이지만 나름대로 알찬 답사 여정을 꾸릴 수 있었다. 나는 답사에 도움을 줄 '답사여행의 길잡이 1편 전북'과 여정 중의 공백을 메꿀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을 배낭 한 구석에 간추렸다.
나는 철도회원카드로 열차표를 예약했다. 전라선. 영등포역 10:40 출발. 13:13 강경역 도착. 무궁화호 특실. 나는 영등포역 광장 전화부스에서 여름휴가를 익산에서 보내고 있는 소선생께 전화를 넣었다. 수화기에서 집과 교회 모두 전화번호가 틀리다는 교환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사를 떠나는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평소 일처리에 있어 치밀한 소선생으로서 실수를 할 사람은 아닌데... 그동안 전화번호에 변경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예정대로 제 시간에 강경에 도착한다는 음성메시지를 소선생 삐삐에 남겨두고 열차에 올랐다.
소선생은 지난 주말에 처자가 있는 익산에 내려가 있었다. 답사 여정을 지리산 자락으로 정하고, 열차표를 예약하는데 옆의 소선생이 귀동냥을 하고 이왕이면 익산 자기집에 들르라고 한마디 넌지시 던지길래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도착역란에 강경이라고 자판을 두드리면서 나는 소선생의 큰딸 채린의 깔깔거리는 천진스런 웃음소리와 이제 막 걸음을 옮겨놓던 작은딸 예린의 뚱한 표정을 떠올렸다. 소선생이 팔자에도 없는 홀아비 노릇을 시작한지도 어언 반년이 넘었다. 그 전에 소선생과 나는 김포 통진에서 버스 두 정거장 사이에 이웃해 살았다. 채린엄마가 전도사로서 마송초등학교 아랫마을 교회에 몸담고 있었다. 퇴근 후 나는 가끔 소선생과 술자리를 했는데, 2차로 입가심 맥주를 소선생집에서 했다. 그때 큰딸 채린은 내가 잔등에 독을 태워주면 숨이 넘어 가도록 깔깔거리며 더 하자고 채근을 부렸고, 작은 놈 예린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느라 식탁 한귀퉁이를 잡고 멀뚱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 보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뻔뻔스럽게 채린엄마의 시원한 콩나물국으로 전날 부대낀 속을 달래고는 귀엽고 예쁜 어린 자매의 배웅을 받으며 소선생 차로 함께 출근했다.
한살이 위인 소선생은 노총각으로 막내기질이 강해 무책임의 도를 넘어 못말리는 행태를 자주 연출하곤 했던 나를 사무실에서나 퇴근 후에도 곧잘 챙겨 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난 일을 돌이키면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는 법인데, 우리 관계는 일방적으로 소선생의 따듯한 정만 내 쪽으로 흘러들어 왔다.(계속)
*사진은 검색엔진 구글에서 이미지를 빌려왔다.
'배낭메고 길나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왕봉이 지켜보는 여정 - 3 (0) | 2011.09.30 |
---|---|
천왕봉이 지켜보는 여정 - 2 (0) | 2011.09.26 |
남도(南道), 1996년 여름 - 10 (0) | 2011.08.29 |
남도(南道), 1996년 여름 - 9 (0) | 2011.08.05 |
남도(南道), 1996년 여름 - 8 (0) | 2011.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