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천왕봉이 지켜보는 여정 - 3

대빈창 2011. 9. 30. 06:00

                 

미륵사는 3탑 3금당 3회랑의 가람배치라는 일찍이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졌다. 또한 절터에는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을 유추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1호 서석탑이 남아있다. 원래 9층석탑이었는데 무너져 내리는 탑의 붕괴를 방지한다고 일제시대(1915년)에 시멘트를 부어 서남쪽은 콘트리트 덩어리로 변했고, 현재는 동쪽면에 6층까지 원상이 남아있다. 원래는 탑의 기단부 한변의 길이가 10m이고, 상륜부까지 높이는 26m에 달하는 거대한 석탑이었다. 한편 탑의 네귀퉁이에는 탑을 수호하는 석인상이 있었는데, 현재는 한 분만이 오랜 풍상에 시달려 두루뭉실한 돌덩어리로 남아있어 장승의 선조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사지에는 석탑과 돌장승의 원형이라는 두 석물이 너른 폐사지를 지키고 있어, 나같은 뜨내기 답사객의 발길을 끌고 있었다.

또한 절터에는 보물 제236호로 지정된 높이가 4m나 되는 당간지주 2기가 서있고, 목탑터 앞에는 거대한 석등받침이 잔디밭위에 놓여 있다. 한편 컴퓨터로 계산하여, 1993년에 복원된 9층 동석탑이 하얀돌과 금빛나는 상륜부로 동녁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매달린 풍령을 바람이 지나면서 흔들고 갔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발굴유물을 전시하는 유물전시관은 매주 월요일이 휴관이었다. 채린과 예린은 너른 절터를 뒤덥고 있는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뛰어 놀기에 정신없다. 어린 마음에도 해방감이 발동했는 지, 여정이 끝난뒤 인화한 사진에 활달한 녀석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서석탑을 담은 사진 왼쪽하단에 탑을 향해 나있는 길을 따라, 탑과 가까운 쪽에 언니가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들고, 동생은 뛰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글을 이어가다말고 나는 사진을 들여다보고 빙긋이 웃음을 짖는다. 녀석들은 지금도 미륵사지의 석탑과 석인상을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그날의 한때가 어린 자매의 무의식속에 입력되어, 먼 훗날 불현듯 녀석들의 의식속으로 출력되길 바라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손때가 묻은 문화유산을 직접 눈으로 익힌 오늘 하루가 녀석들의 문화적 감수성의 자양분이 되기를 바라면서...

절터를 벗어나며 다시한번 서석탑을 한바퀴 돌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석탑 뒷면 무지막지하게 콘크리트로 쳐발라놓은 상처를 거대한 상록수 한 그루가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 가려주고 있었다. 너댓명의 사람들이 가지가 드리운 그늘 아래의 무너져내린 탑부재에 누워있거나 야외용 돗자리를 깔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연륜이 꽤 들어보이는 나무를 알고싶어 나는 철책에 반쯤 윗몸을 기댄 중년사내에게 물었다.

“이거 마을사람들이 정자나무라 하던데요”

“아니, 그게 아니고 수종이 무엇인지...”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자나무라고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있었다.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서구의 물신주의에 밀려 우리 정신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했던 당산나무는 미신으로 재단되어 마을나무나 정자나무로 이름갈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을에서 쫒겨난 정자나무가 일제시대를 겪은 우리 역사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미륵사지 서석탑의 상처를 발가벗겨진 땡볕 아래에서 가려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음 일정을 전남구례 화엄사로 잡았다. 하지만 답사여행의 길잡이가 안내하는 왕궁리 오층석

탑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무왕이 별궁터를 잡았다는데서 지명이 유래했다. 사방이 툭터진 그리 높지않은 언덕에 보물 제44호로 지정된 오층석탑이 서 있었다. 초입에는 1971년에 심었다는 배롱나무 군락이 붉고 고운 꽃망울을 매달고 답사객을 맞아 주었다. 예린이가 칭얼거려 할 수없이 3모녀는 입구 매점에 묶였고, 소선생과 단 둘이 언덕에 올랐다. 탑은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과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한 백제탑이다.

1965년 섣달 탑을 중수할 때 금제 사리함과 유리제 사리병, 금판에 새겨진 금강경과 청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름다움을 고최순우관장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호사스럽고 다양해야만 정성이 들었다거나 또 아름답다는 속된 솜씨가 아니라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서 만든 청순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다.

여정을 준비하면서 나의 가슴속에 품은 『백두대간』, 그 끝머리 지리산이 품은 고찰 화엄사를 향해 일행은 시동을 걸었다. 시인 고은은 ‘절을 찾아서’에서 청정고승들에 의해 유지되어온 화엄사의 내력을 담은 전설을 이렇게 소개했다. - 옛날 어느 노승이 꿈에 염라의 심부름꾼을 만났다. 그 심부름꾼은 말했다. “노스님, 노스님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갚아야 할 창호지 몇장의 빚이 우리 염라대왕의 책에는 치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노스님께서 우리 염라대왕한테 오실 분은 아니고, 아무래도 하늘에나 가셔서 살 것으로 믿지만, 우리가 거기까지 가서 노스님더러 빚을 갚으라고 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화엄사에 계신 때 아주 그 창호지 빚을 갚아버리시라고 온 것 입니다” 이런 꿈속의 말을 듣고 깨어나서 밤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상좌가 글씨공부를 하다가 종이가 모자라서 꿈뜨고 있을 때 화엄사 종무용(宗務用)의 창호지를 가져다가 주었다. 그뒤 창호지를 사다가 메꾸어 두려 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