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의 택리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전라도는 남원과 구례, 경상도는 성주와 진주를 꼽았다. 차창으로 보이는 길가나 낮은 구릉마다 붉은 꽃을 매단 배롱나무가 지천이다. 춘향터널을 지나자 남원시내였다. 구례로 넘어서면서 배롱나무꽃이 더욱 붉어진 것 같았다. 지역으로 더욱 남녘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오후 시간이 흐르면서 빛의 굴절에 따른 시각차이에서 오는 나의 착각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은놈 예린이가 멀미가 나는 지 엄마품에서 연신 칭얼거렸고, 채린이가 자꾸 앞좌석으로 넘어와 뒷좌석에 설치하는 유아용 안전놀이매트를 도로가 휴게소에서 마련했다. 둔중한 지리산의 산세가 점차 가까워오는데 채린은 연신 바다타령을 했다. 아마 채린이는 아빠가 여름휴가를 백부댁이 계신 울진 바닷가로 정한 것을 귀동냥한 모양이다. 소선생 가족은 화엄사에서 일박하고 내일 울진으로 향한다고 했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가 위치한 행정구역명이다. 우리 일행은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언젠가 신문지상에서 보았던 대학가의 소비풍조를 반영한다는 캠퍼스 타운의 몰골보다 한술 더 떴다. 숙박시설과 기념품가게, 노래방, 술집...등이 제각기 한자리씩을 깔고 앉았다. 주차장을 가득매운 차량과 수많은 인파. 소선생과 나는 일행이 하루 묵을 장소를 물색하러 계곡아래 야영장으로 내려섰다. 계곡물이 가까운 목좋은 곳은 한발앞서 텐트가 가득 들어찼다. 어린 채린이와 예린이가 하루를 묵기에는 주위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나는 소선생 가족에게 민박을 권유했다.
마을안 고샅길이 미로처럼 복잡했다. 냇돌로 다져쌓은 키작은 담장 너머로 뜰안 장독대의 항아리가 몇개인 지 훤히 들여다 보였다. 뜰 안에는 감나무의 무성한 가지가 장독위로 쏟아지는 사위여가는 햇살을 막아 그늘을 드리웠다. 푸른 조릿대가 한켠에 군락을 이루었고, 키작은 상록수가 돌틈에 뿌리를 내렸다. 담쟁이와 호박넝쿨이 돌담을 기어 오르는 남도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에 일행은 민박을 정했다. 민박집 할머니는 세상모르게 툇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줄곧 칭얼거리던 예린이도 방에 눕히자 금방 잠이 들었다. 모기가 극성이다. 소선생은 차로 모기향을 구하러 화엄사 위락단지로 향하고, 나는 배낭속의 전자모기향을 꺼내 예린이 옆에 피워 놓는다.
대나무로 엮은 평상에 올라앉아 채린엄마가 솜씨를 발휘한 저녁을 먹는다. 제육볶음과 상추쌈 그리고 김치밖에 없는 찬이지만 일행은 포만감을 만끽한다. 언제 보아도 어린이들은 금방 친해진다. 아마 잇속따지는 세상물정에 물드지 않은 그들만의 순수함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습이다. 채린이 또래인 주인집 손주녀석이 저녁밥상에 합류했다. 점점 어두워오는 하늘에 벼락의 날카로운 잇빨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뒤이어 천둥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나는 채린의 능청에 하마트면 입안에 가득 문 밥알을 식탁에 파편처럼 쏟아낼 뻔 했다.
“어허,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상체를 좌우로 흔들거리며 천연덕스럽게 어른 말투를 흉내내는 채린의 우스개 소리에 한바탕 폭소가 터지는데 영문을 모르는 예린이만 뚱한 표정으로 어른들을 하나하나 쳐다 보았다.
안마당 한켠 돌담에 붙은 수돗가에서 저녁 설거지를 하고 소선생과 나는 슬라브 옥상에 술자리를 마련했다. 어디선가 발파작업을 하는 지 간헐적으로 폭음이 들려왔다. 지리산이 어둠에 잠겨들고 있었다. 골짜기를 기어 오르는 안개가 먹이 번져나가는 효과를 노린 산수화의 농염법같았다. 채린이와 예린이는 알전구가 불을 밝힌 안마당에서 주인집 손주녀석의 세발자전거와 코뿔소 모형의 자동차를 타고 노느라 신이 났다. 빗방울이 하나둘 돋기 시작하는 남도 시골의 한적한 초저녁 풍경을 머리에 붉은 등을 매단 키큰 ‘지리산스위스관광호텔’이 거만한 시선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안마당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나는 힙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채린이와 예린이가 서로 세발자전거를 타겠다고 옥신각신하며 “아빠, 엄마”를 찾았다. 방안에는 저혼자 몸을 태우는 모기향이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렸고, 나는 누운채 방충망너머 지리산 연봉을 올려다 보았다. 매캐한 모기향과 밤새 방충망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스며 들어온 냉기에 시달렸는 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무겁다. 나는 게으른 나무늘보마냥 느릿느릿 이부자리를 개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해는 어느새 지리산 봉우리위로 올라와 고즈넉한 산골마을에 햇살을 흩뿌렸다. 수도꼭지를 열어 쏟아지는 물줄기에 미열로 찌뿌둥한 머리를 헹군다. 어쩌면 지리산의 무게가 밤새 나의 몸으로 흘러 들어와 이렇게 몸이 무거운지도 몰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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