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천왕봉이 지켜보는 여정 - 6

대빈창 2011. 11. 11. 02:27

소선생이 먼저 내려가고 나는 돌바닥에 주저 앉았다. 지리산 연봉이 사사자삼층석탑을 굽어보고 있었고, 적막하고 고요한 산중에 계류 흘러가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왔다. 각황전의 세월먹은 처마 끝머리가 눈앞에 내려다 보이고, 부드러운 아침햇살이 용틀임하는 가지를 하늘로 울울하게 치뻗은 소나무의 비늘에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왠지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각황전앞 석등 주위에 있어야 할 소선생 가족이 보이지 않았다. 계단밑으로 저멀리 네 가족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천왕문에 이르러서야 따라 잡았는데, 예린이가 ‘아빠! 무서워’하며 소선생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아빠의 등에 업힌 예린은 험상굿은 사천왕상의 모습이 무서웠던지 절집을 다 빠져 나와서도 겁먹은 표정으로 아빠곁을 떠날 줄 몰랐다.

우리 일행은 화엄사를 빠져나와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피아골에 숨어 있는 연곡사를 찾아 19번 국도로 들어섰다. 답사여행중에 찾아가는 목적지가 대부분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있는 소선생이 나를 위해 연곡사 입구까지 바래다주고 익산집을 향하기로 했다. 어린 예린이의 차멀미로 멀리 울진까지 여름휴가를 떠난다는 것은 무리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극성스런 채린이의 바다 타령으로 소선생 가족은 익산에서 그리 멀지않은 변산반도 줄포에서 오붓하게 가족끼리 피서를 했다.

19번 국도는 드라이브 코스로 최상이다. 왼편으로 지리산 연봉이 줄줄이 차창의 시선을 붙들어 매고, 금상첨화로 길아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맑다는 섬진강이 굽이굽이 차길과 어깨동무를 같이한다. 얼마쯤 가자 이땅에서 최고 명당자리에 들어앉았다는 오미리의 운조루를 알리는 푯말이 나타났다. 중요민속자료 제8호인 운조루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쉬웠지만, 예린이의 보챔에 나는 욕심을 접어두고 시선을 오른쪽 차창에 고정시켰다. 흰 모래사장이 부드러운 굴곡을 이룬 강변너머에 시골마을이 산자락에 붙어 있었다. 햇살을 받아 금비늘이 너울거리는 강물에 한가로이 나룻배가 떠 있다. 양안에는 여적 붉은 꽃망울을 매단 배롱나무가 점점이 무늬가 놓인 자수처럼 아름답다. 나에게는 섬진강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이름하여 ‘섬진강 시인 김용택’ 그는 임실군 덕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섬진강을 노래했다. 창비시선 46으로 출판된 그의 시집 '섬진강' 1부에는 모두 20편의 섬진강을 노래한 시들이 실려있다. 시인은 겉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섬진강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깊이 뿌리박은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읊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의 시편을 읽어 나가다보면 자연스레 신경림시인의 농무가 연상되었다. 백지장보다도 가벼운 도회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농촌 정경이 아닌, 구절구절 민초들의 애달픈 삶의 현실을 노래했다. 그 점에서 나는 두 시인의 가락에서 비슷한 여운을 느낀다.

차는 피아골로 들어가는 865번 지방도로로 접어 들었다. 섬진강에 합류하는 연곡천을 따라 깊은 지리산골로 들어가면 좌우 산비탈을 일구어 만든 계단식논이 시야를 압도한다. 소선생은 그 논을 ‘공중배비, 삿갓배미’라고 하면서 그 연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계단식 논들은 경사면을 따라 돌담장을 쌓아 올렸는데, 하나같이 석축밑변보다 논바닥이 넓은 둔각을 이루고 있다. 즉 논이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르게는 한여름 삼복더위에 김매기를 하다 잠시 쉬려고 삿갓을 벗어 놓았다가 자기논을 잃어 버렸다는 크기의 과장에서 비롯됐다. 가파른 계곡의 산비탈을 깍아 논을 만들었으니 채 열평도 되지않는 논이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어렸웠던 시절 우리 농민들의 논에 대한 소유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여정을 끝내고 나는 다시한번 피아골의 계단식 논을 찾으려 했으나, 어이없는 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휴가를 끝내고 사무실에 나타난 나에게 동료들은 이번 여정에서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을 물어왔다. 나는 어렵지 않게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입구의 계단식 논 - 이라고 답했다. 뒤이어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대뜸 한 동료가 그곳에 꼭 가야할 이유가 있다며 나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다. 나는 흔쾌히 받아 들였다. 한달이 채 못되어 PC통신으로 구례까지 주말 열차표를 예약해 놓았다. 그런데 가든 상호와 안개가 복병처럼 우리 여정을 훼방놓았다. 일요일 이른시간 자욱한 안개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차를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30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다급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지만 신호음만 초조한 나의 마음처럼 연이어 들려왔다. 다음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동료는 시야를 분간할 수 없는 안개속의 ‘한들고개 가든’ 입구에서 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내가 사는 마을의 자연부락명이 한들고개였다. 우리는 내가 살고있는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약속장소를 잡았다. 하지만 이웃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가든상호가 ‘한들고개’일 줄이야. 덜렁거리는 나의 성격이 만든 에피소드였다. 국민식량의 안정적 생산에 걸림돌이 되는 휴경지 일소에는 무엇보다 피아골의 계단식논 정경이 교육효과로 제격이었다. 그러기에 동료는 교육자료를 구하려 나에게 구례 피아골행을 부탁한 것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