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천왕봉이 지켜보는 여정 - 7

대빈창 2011. 11. 28. 03:48

 

이윽고 연곡사 매표소에 도착했다. 소선생 가족과 나는 작별을 해야만 했다. 뒷차창으로 채린이와 예린이가 앙증맞게도 고사리같은 손을 내게 흔들어 보였다. 관람료는 2,000원. 영수증 앞면에는 지리산 연봉위로 덮힌 운해가 사진으로 실려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연곡사의 상징인 동부도를 싣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에서는 연곡사를 - 부도중의 꽃, 부도중의 부도 -라고 소개했다. 탑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면,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석물이다. 신라와 발해의 남북시대말기 선종이 출현하면서 조사와 선사들의 위상이 제고된다. 여기서 누구나 깨달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논리가 부도를 탄생시켰다. 현존 최고의 부도는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진전사터 도의선사 부도이다. 불탑이 대웅전의 주불 정면에 놓인 반면 부도는 절집 주변 한적한 곳에 위치했다. 그러기에 화엄사처럼 고승이 많이 주석한 절집에는 한켠에 부도밭이 만들어 졌다.

매표소를 지나면 일주문까지 아스팔트로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고 길가에는 양옆으로 키작은 단풍나무가 가로수로 조성되었다. 정수리 위로 솟구치는 한여름 햇살로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적막한 골짜기에 피아골을 우당탕 치내려온 계류소리가 요란하다. 일주문 양옆으로 키높이의 돌담장이 배롱나무와 같이 연곡사 경내를 구역지었다. 경내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여 우리가 흔히 갖고있는 말그대로의 산사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아침나절에도 북적거리는 인파에 몸살을 앓던 화엄사에 비하면 연곡사는 정오가 가까워 오건만 계곡 물소리와 산새, 풀벌레의 울음소리만 적요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찰건물로는 덩그런히 대적광전만 서있는데 두서명의 아낙네가 부처님께 연신 절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조형적 완벽성을 자랑하는 동부도로 곧장 향했다. ‘부도중의 부도’로 단아함과 함께 화려한 멋을 지닌 부도는 신라말기에 조성되었지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국보 제35호인 부도의 몸돌에는 사천왕상, 문비, 가마등이 부조되었고, 상륜부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사방에 배치된 가릉빈가의 머리가 모두 잘려 나갔다. 부도 앞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거북등에 양날개를 새겼다.

북쪽으로 150m정도 산을 오르면 주인을 알 수 없는 국보 제54호인 북부도가 자리잡고 있다. 형태나 크기, 심지어는 조각내용까지 똑같다. 제작시기가 뒤떨어진 동부도의 모방작이라 한다. 부도를 담으려는 지 중년남자 2명이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북부도에서 서쪽으로 100m정도 산을 내려오면 보물 제154호로 지정된 서부도, 즉 소요대사 부도가 서있다. 이 세개의 부도는 닮은꼴이 비슷한데 그 제작순서는 동부도 → 북부도 → 서부도이다. 서부도 한켠에는 석종형부도 서너개가 부도밭을 지키고 있다. 서부도를 내려오면 보물 제152호로 귀부와 이수만 남은 현각선사 부도비가 맞아 주는데, 표창같이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사나운 용머리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있었다. 현각선사 부도비 위쪽에는 해묵은 동백 서너그루가 만들어 준 그늘아래 의병장 고광순의 순절비가 있다. 을사조약으로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는데, 그중 고광순은 연곡사를 근거지로 가열차게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 의로운 넋이 지금 여기 잠들어 있었다.

단풍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상록수가 우거진 새로 주조된 범종을 앉힌 범종각 앞 오른편에 삼층석탑이 채마밭을 앞에 두고 외롭게 서있다. 인기척에 놀랐는 지 2층 지붕돌에 앉아있던 까치 한마리가 푸드득 놀라 계곡쪽으로 저공비행하며 날아갔다. 석탑을 서너그루의 은행과 단풍이 에워쌓고, 나이먹은 버들가지가 산들바람에 여린 가지를 하늘거렸다. 계곡너머 겹겹이 주름진 산마루를 바라보며 피아골 깊숙이 들어앉은 절집 연곡사에 내가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땀을 씻으려 돌거북머리로 물을 내보내는 수조에서 손수건을 적시는데, 청주에서 왔다는 두 중년여인이 말을 건넨다. 한 여인의 옆구리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가 들려져 있었다. 절집을 나서려 배낭을 추스리는데 고맙게도 포도 한송이를 건넨다. 포도의 시큼한 맛이 지열로 달아오른 아스팔트를 걷는 노역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보이는 매표소의 젊은이에게 하동 쌍계사행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길안내를 해준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는 평도마을에서 버스가 출발하지만 외곡리검문소에서 차를 갈아 타야 하는데 차편이 불편하다는 것이다.(계속)

 

p. s 채린과 예린 자매는 숙녀가 되었다. 채린은 고3, 예린은 고1로 오랜전에 아빠의 전출을 따라 서울 생활을 하고있다. 3년전인가 충남 논산에서 오랜만에 상봉했다. 자매의 외할머니 장례식장이었다. 동생 예린은 엄숙한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나몰라하며 나를 떠들석하게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