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눈을 부릅뜨고 발밑에 아귀를 밟고 있는 사천왕상을 지나치면 정면으로 석등이 가로막는다. 보물 제35호로 지정된 높이 5m의 이 석등은 다른 절집에서는 볼 수 없는 불을 밝힐때 사용했다는 돌계단이 석등앞에 놓여 있다. 석등 왼켠 작은 연못의 비단잉어가 더위를 피해 버드나무 가지가 드리운 그늘속으로 몸을 숨켰다. 보광전 앞 보물 제37호인 삼층석탑이 동서로 서 있는데 눈에 낯설지 않다. 상륜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내게는 상륜부가 몸돌에 비해 너무 커 가분수처럼 보였다. 보광사옆 공터는 예전에 우람하고 질좋은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발굴을 한다고 베어내버려 휑뎅그렁하다. 사역을 따라 흙과 막돌을 개어 담장을 낮게 둘렀는데 위에는 기와를 얹었다. 해우소가 수명이 다 되었는 지 바로 옆에 현대식 화장실을 새로 지었다. 보물 제38호인 증각대사응료탑은 연잎이 가득메운 작은 연못가에 자리잡았다. 증각대사부도비의 이수는 한귀퉁이가 깨졌는데 그 틈에 벌집이 자리를 잡았다. 폭양에 달아오른 귀부와 이수에 벌들이 기어다녔다.
나는 산죽이 울창한 극락전 옆에서 땀을 들이고, 수철화상능가보월탑과 부도비를 일별하고 경내를 나섰다. 실상사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을 꽃잎으로 삼아 꽃밥자리에 절을 앉혔다고 한다. 그러기에 불이문앞에 서면 정면으로 천왕봉이 마주 보였다. 시야를 멀리하면 웅장한 지리산 연봉들이 성큼 다가선다. 청왕봉 정상은 흰구름속에 잠겨 있었고, 좌우로 실상사를 감싼 연봉들의 멀고 가까움이 짙고 연한 음영으로 겹쳐졌다. 반야봉, 노고단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만수천에 모여 실상사를 스쳐 지나갔다.
이정운씨는 함양행 차편이 있는 인월에서 나를 내려주고 피아골 당치마을로 향했다. 나는 지리산의 서남쪽 산록인 전라도의 구례와 남원을 거쳐 동북쪽 산자락에 기대어 있는 경상도의 함양행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원군 인월에서 함양까지는 20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오히려 함양에서 화림동 계곡을 찾아가는 길목인 안의가 멀게 느껴졌다. 함양은 덕유산과 지리산의 두 산줄기가 자락을 늘어뜨린 산간분지로 넓은 골짜기를 맑고 풍부한 계류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지역이다. 화림동계곡에는 굽이굽이 치내려온 물줄기가 기암괴석과 너럭바위를 타넘으면서 절경을 이룬 곳에 옛 선비들이 정자를 세웠다. 이름하여 화림동의 팔담팔정(八潭八亭)이다. 현재는 1613년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숙이 세운 거연정과 조선의 대학자 정여창이 시를 읊었다는 군자정, 동호정 그리고 지족당 박명부가 세웠다는 농월정이 남아있다. 내가 함양의 화림동 계곡을 찾은 것은 우리나라의 정자문화를 대표하는 곳에 발길을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남도, 1996년 여름' 여정에서 무등산 북쪽 기슭 담양에 자리잡은 호남 정자문화의 산실인 소쇄원, 면앙정, 송강정, 명옥헌, 식영정, 독수정, 취가정중 어느 곳하나 들르지 못했다. 그러기에 영남 정자문화를 대표하는 화림동 계곡을 오늘에야 찾았다.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려는 지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택시를 불러 농월정으로 향했다.
기사 아저씨는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는 방법이라며 계곡에 걸쳐진 다리너머 마을에 나를 내려 놓았다. 안의 버스정류장에서 농월정까지 택시요금은 3,000원이었다. 마을집들은 하나같이 신식 기와를 얹었는데 토종닭, 매운탕, 노래방, 술집의 간판을 달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입장료는 고작 400원이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농월정을 보기위해 비싼 택시비를 지불하고, 알량한 입장료를 아낀 도둑 답사객이 되었다. 너럭바위를 타고넘는 계류를 거슬러 올라가니 난데없이 뽕짝 메들리가 하늘이 무너져라 꽝꽝 울려왔다. 주차장에 가득 들어찬 관광버스 거기서 쏟아진 무리들이 농월정 입구를 완전 점거하고 있었다. 자연과 더불어 음풍농월을 즐겼던 선비들의 놀이장소에 천박한 현대식 놀이문화가 점령한 말그대로의 행락관광지가 농월정이었다. 새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처럼 하늘에는 난데없이 대형 에드벌룬이 떠있고, 불콰해진 얼굴의 중년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쿵따리 샤바라’의 클론 춤동작으로 연신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지리산 심심산중에서 흘러내려온 계곡에는 반벌거숭이 남녀노소가 아예 피서가 아닌 목욕중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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