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빼어난 주변 풍광을 거느린 농월정 주변은 사람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농월정은 계곡 건너편 울창한 소나무숲에 바짝 등을 기댔고, 면적이 무려 1,000여평 남짓이나 된다는 너럭바위를 안마당으로 삼았다. 이 바위를 달바위(月淵岩)라 부른다. 이 넓은 반석위에서 한줄기로 흐르던 물줄기가 바위골을 따라 여러 줄기로 나뉘고, 다시 한줄기로 합수 되었다. 또한 급하게 소용돌이치는 물줄기가 바위에 작은 소와 폭포를 만들었다. 정자는 자연석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에 난간을 걸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추녀 네 귀에는 활주를 받쳤다. 이층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었는데, 마구 들이닥친 인파들로 인해 몰골이 형편없었다. 세월을 먹은 나무기둥이 점차 삭아 아랫부분을 베어내고 높이에 맞춰 시멘트 기둥을 덧댄 것이 7개나 되었다. 현재의 관리상태라면 조만간 나무기둥을 전부 시멘트덩어리로 교체할 수 밖에 없다. 베어진 기둥 아랫부분 토막들이 누마루 아래에 볼성사납게 널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빗방울이 하나씩 돋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트로트 메들리와 거기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는 인파를 바라보며 나는 농월정을 벗어났다. 26번 국도를 따라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을 차례로 답사할 계획을 변경해 곧장 산청으로 향하기로 했다. 마침 빈택시에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안의터미널에 도착하니 바람이 세찬 가운데 빗줄기는 폭우로 변했다. 대합실에서 짙은 사투리로 주고받는 두 아낙네의 날씨걱정으로 보아 여기는 어제도 많은 비가 퍼 부었다. 어제 구례에서는 몇방울의 빗줄기만 줄금거리다가 그쳤는데... 깊고 넓은 지리산의 조화였다. 산청으로 향하는 중간지점인 수동에 다다르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었다. 지리산 자락을 운행하는 버스에는 공통점이 있다. 카스테레오에서 쉴새없이 쏟아지는 뽕짝메들리였다. 창밖으로 경호강이 내내 따라오며, 멱감는 벌거숭이 아이들과 투망질하는 노인네 그리고 긴 장대로 노를 저르며 강을 가로지르는 나룻배를 사진필름처럼 차창에 인화시켰다.
나는 산청터미널에 내려 철도회원카드를 이용해 ARS로 진주에서 영등포행 무궁화호를 예매했다. 어스름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한식집 영화식당에 들르니 메뉴판에 복국이 5,000원이라고 적혀있다. 산중마을에 복요리가 더군다나 그것도 저렴한 가격이다. 나는 여적 값이 비싼 복요리를 구경하지 못했다. 냉면곱배기 그릇크기에 나로서는 어떤 종류의 복인지 잘 알수 없는 생선토막과 콩나물이 맑은 국물에 푸짐하게 담겨졌다. 밑반찬도 맛이 정갈하다. 드넓은 들녘과 바다와 접해 맛좋기로 이름난 전라도 음식에 뒤지지 않는 경상도 산간 소읍의 한끼 식사였다. 나는 삼성장 2층방에 여정을 풀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관 뜰안에 심은 감나무의 두텁고 미끈한 잎사귀가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하늘은 무거운 낮색으로 낮게 가라 앉았다. 아침으로 다시 복국을 찾아 나는 영화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청에서 원지를 거쳐 남명 조식유적이 있는 시천으로 향했다. 경호강너머 산자락에도 연곡사 입구에서 보았던 계단식논들이 펼쳐졌다. 상념없이 연이어진 논들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난데없이 완전 벌거숭이의 나즈막한 산이 강가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해병대원의 빡빡밀은 뒤통수를 연상시켜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갑자기 뒷머리가 시끄러워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뒷자석에 앉은 촌로들이 다소 억센 사투리로 중구난방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노인네들의 대화에서 ‘민속촌’이라는 한토막을 건져내고는 황급히 눈을 오른쪽 차창으로 옮겨갔다. 눈아래 개울이 반달로 휘감은 터에 들어앉은 흙돌담으로 에둘린 말그대로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밀집되어 있는 남사마을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남명 조식유적중에서 먼저 덕천서원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길가에 접해있는 시정문(時靜門) 좌우로 낮은 돌담이 둘러있고, 위에 암키와를 얹었다. 정문 오른편에 남명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키큰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잔디를 곱게 입힌 마당에 좌우로 동·서재가 마주보고, 정면으로 경의당과 숭덕사가 일직선에 서있다. 남명은 진정한 처사로 당시 형이상학적 논쟁에 매몰되어 있던 학문적 풍토에서 의와 실천을 강조한 독자적인 학풍을 추구했다.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제자들이 풍전등화의 임진란때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정의감이 강한 학자로서 그의 인품을 알 수 있는 글이 ‘남명집’에 실려있다.
- 선생은 작은 칼을 차고 다니기를 좋아했는데, 칼에는 다음과 같은 명(銘)을 새겼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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