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서원과 큰길을 마주보고 덕천강가에 남명선생 이전부터 있었다는 세심정(洗心亭)이 자리 잡았다. 잔 자갈이 깔린 강바닥을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강변에는 드물게 상록수가 열지어 서 있어, 그 여백으로 보이는 정경이 풍치가 있었다. 답사여정중 만나는 정자마다 ‘출입금지’ 경고판이 여행객을 주눅들게 하지만 세심정은 누구나 마루에 오를 수 있다. 두폭의 마루를 잇댄 틈새가 벌어져 바닥이 내려다 보였다. 나는 세심정 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메모노트를 펴 들었다. 마루에는 촌로들의 베개인 토막과 걸레, 파리채가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소슬바람에 땀을 들이며 나는 남명의 처사로서의 삶과 그 제자들의 국망의 기로에서 구국투쟁, 조선 역성혁명 세력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된 고려의 마지막 신하 정몽주와 조선 중기이후 정계를 장악하는 사림세력의 관계를 떠올리다 문득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하였다.
덕천서원과 세심정에서 덕천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다 다리를 건너기전 학교가 있다. -덕산중고등학교 - ’96년에 2월에 나온 ‘답사여행의 길잡이 5 지리산자락’의 남명 조식유적을 찾아가는 지도를 보면 단성중고등학교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고보니 원지에서 들어오는 버스의 앞창에 붙은 노선 안내판에는 분명히 시천이 아닌 덕산으로 표기되었다. 원이름인 덕산을 찾은 것 인지도 몰랐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잔뜩 찌뿌렸던 하늘이 언제 그랬는가 쉽게 따갑다 못해 살갗을 후벼파는 듯한 강렬한 햇살을 퍼부어댔다. 큰길에서 고작 50m거리를 오르는 남명묘소에 다다르자 나는 막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온몸이 땀에 흥건했다. 아마도 큰어른을 찾아가는 길이니만큼 이 정도의 절차를 거쳐야하는 것은 당연한 지도 몰랐다. 제설대신 나는 이곳까지 나를 안내해 준 ‘답사여행의 길잡이’ 책을 상석에 올려놓고 절을 올렸다. 묘앞에 서면 눈앞에 덕천강이 마을을 휘돌고 지리산 천왕봉이 바짝 다가선다. 묘앞에는 총탄자국이 뚜렷한 신도비 세개가 뉘여 있다. 후손과 문도들이 고결한 남명의 명성에 흠집을 입힌 몰골이다. 오던길을 되돌아 나오면 쉬울 것을 송시열 신도비를 찾아 반대방향으로 길을 타다 나는 잡목숲에 갇혀 버렸다. 어렵게 길가를 향해 밑으로 내려오니 대나무가 빼곡한 가운데 돌담장이 가로 막는다. 무슨 사당이려니 하고 길건너 산천재로 향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남명 별묘였다.
산천재(山天齋)는 덕천강 절벽에 돌담을 둘러쳤다.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에 “남명학연구소”가 선생의 모습을 닮아 소담하다 못해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다. 산천재 안뜰은 잔디가 곱게 입혀졌는데 아낙네 두분이 잡풀를 뜯고 있었다. 남명이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재 툇마루 윗벽에는 벽화 세폭이 용하게도 남아 있었다. 농부가 소를 쟁기질하는 모습과 신선이 나무그늘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그림 그리고 허유와 소부의 고사를 담은 그림이다. 귀를 냇물에 씻는 선비는 허유이고, 귀를 씻은 더러운 물에 자기 소에게 물을 먹일 수 없다고 뒤돌아서는 농부는 소부다. 툇마루를 오르는 댓돌에 올라서면 천왕봉 정상이 보인다. 강가에는 배롱나무 울타리가 쳐져 시야를 가렸고, 잠겨있는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이불이 한구석에 개여있어 살림살이를 하는 것 같았다. 뒷마당을 한바퀴 돌아보고 안뜰로 나오니 소풍나온 아낙네 둘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밥에 콩잎장을 얹어 점심을 들고 있었다. 안뜰 강가에 붙어있는 안내판에는 남명선생의 사상과 인격, 생애를 간략하게 왼쪽에 적고, 오른쪽에는 시 2편이 실려 있어 남명의 큰뜻을 읽어 볼 수 있다.
題德山溪亭(덕산 계정의 기둥에 적음)
請看千石鍾(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非大打無聲(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네)
爭似頭流山(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德山卜居(덕산에 터를 잡고서)
春山底處無芳草(봄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 서라네)
自手歸來何物食(빈 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걸까?)
銀河十里 猶餘(십리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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