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를 접고 산천재를 나오는데 할머니 한분은 아예 도시락을 베고 오수에 빠져 들었다. 남명학연구소에 연이어 사리회관 경노당이 있는데 한낮부터 할머니들의 말다툼 소리가 요란하다. 산천재옆 가게에서 진주행 직행을 기다리는데, 길건너 맞은 편에 작은 비각이 보였다. 직감으로 송시열 신도비였다. 신도비앞 자투리 땅에 키작은 단풍나무와 회양목이 비좁은 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 세운 신도비는 흙돌로 둘러싼 시골 뒷간만한 담장안에 보호되고 있었다.
글을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지리산은 남원, 구례, 하동, 함양, 산청을 품안에 안고 있다. 진주로의 발길은 나의 여정에서 끝 마무리로, 하동 쌍계사에 발길이 미치지 못한 아쉬움을 진주성지의 답사로 대신하려는 보상 욕구의 발로였는 지도 모르겠다. 산천재에서 진주성지까지는 고작 1시간 20여분 거리였다. 진주성은 진주 시민의 공원으로 관람료는 330원으로 저렴했다. 관람권 전면에 남강을 앞에 둔 진주성지 전경이 담겨 있었고, 뒷면에 진주성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했다.
진주성(晋州城) : 사적 제118호
가야의 터전이었던 진주성은 언제 축조되었는 지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거열성, 만흥산성, 촉석성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본시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우왕 5년(1329)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둘레는 약 1321m(4329척), 높이는 5m(15척)이며 성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3개 있고 군창이 있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시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적은 군사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크게 물리쳐 임진왜란 3대첩을 이루었으며 이듬해(1593년)에 왜군의 재침을 받아 중과부적으로 7만민, 관군이 장렬히 순절한 성지로 1979년부터 정화사업으로 펼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성벽이 둘러친 넓은 성지에 잔디가 곱게 단장되었고, 스프링쿨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오후의 햇살이 무지개를 그려냈다. 잔디밭 사이로 난 보도블럭을 따라 촉석루로 향했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세워진 촉석루는 유사시에 장군의 지휘본부로, 평시에 과거 시험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촉석루에는 막바지 더위를 피해 공원을 찾은 시민들로 발들여 놓을 틈도 없었다. 나는 촉석루앞 성벽에 난 문을 통해 남강가에 자리잡은 의암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위에 섰다. 어른 네다섯명이 걸터 앉으면 꽉 들어찰 크기의 의암을 배경으로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의암을 마주한 성벽밑에는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편액을 단 작은 비각이 자리잡았다.
진주성하면 자연스럽게 임진왜란과 진주성 전투를 이끈 김시민장군 그리고 논개가 떠 오른다. 1592년부터 1598년에 걸친 두차례의 왜군침입전쟁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합쳐 일반적으로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통일하였을 때 조선은 당쟁의 격화로 정계가 혼란하고 사회기강은 문약했다. 풍신수길은 이 틈을 이용해 국내의 안정을 도모하고, 제후들의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키려는 의도에서 조선침략을 강행한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조선의 군사력은 전쟁 발발 2개월만에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왜군에 평양성까지 함락당했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적의 보급로인 바다를 장악한 이순신장군의 분전으로 전황는 차츰 역전되기 시작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향하는 요지에 위치한 진주를 함락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 왜군을 적은 군사로 통쾌하게 무찌른 전투가 1차 진주성 싸움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은 애석하게도 적탄에 숨을 거둔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 들면서 화의가 진행된다. 이때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왜군은 재차 진주성 공격(2차 진주성 전투)을 감행한다. 이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을 비롯한 진주관민 6만여명이 희생되었다. 이때 왜군이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때 왜장을 남강으로 유인하여 강물에 빠져 순절한 의기가 논개다.
강건너에는 고층 아파트 군락이 자리 잡았고, 왼편으로 진주교가 강을 가로 질렀다.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녹조류가 점령하여 물빛마저 희뿌연한 강가에서 한 젊은이가 찌도 없는 낚시대를 드리우고 망연히 먼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국립진주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물관에는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장신구, 마구, 갑옷등이 집중 전시되고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복도에 모형 가야시대 무덤이 뉘여있다. 박물관 유물의 관람순서는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가 거꾸로 2층부터 구경하고 1층으로 내려오게 설계되었다. 계단을 오르면 정면벽에 울산시 언양면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가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아쉽게도 설명문 하나없이 암각화의 동물 문양만 덩그런히 형광불빛에 내 비쳐졌다. 의령 대의면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토기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꼬마들의 손 단속을 하는 지 젊은 아낙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만지면 안된데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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